자금력 세운 국제대회 독식 '춤추는 베이징'
1993년 9월 23일 밤, 중국인들은 몬테카를로에서 열리는 제27회
2000년 올림픽 개최지 선정 중계를 보기 위해 TV앞에 모여 앉았다. 1차에서 3차투표까지 1위를 달리던 베이징은 결국 자정을 넘긴 4차
결선투표에서 시드니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1991년 2월 26일 올림픽 유치 신청 이후 2년 7개월의 길고 험난했던 올림픽 유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베이징올림픽 개최를 그토록 열망했던 덩샤오핑(鄧小平)은 물론 모든 중국인들이 허탈감으로 깊은 침묵에 휩싸였고 중국은
그야말로 ‘초상집’ 분위기였다. 경제성장에 자신감을 얻은 중국정부의 야심찬 계획은 중국의 인권, 교통, 환경, 시민의식 결여 문제 등
오히려 중국의 부정적인 면만 부각시키고 실패로 막을 내리고 만 것이다. 애꿎은 북한에게만 1992년의 한중수교에 불만을 품고 중국의 올림픽유치를
방해했다는 혐의가 씌워졌다.
베이징 올림픽서 미스코리아선발대회까지 국제대회
'블랙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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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베이징의 거리에 있는 올림픽 마크. 개최지 선정이 결정되지도 않았음에도 베이징 곳곳에 올림픽 관련 조형물들을
볼 수 있었다. | 그러나 그것은 각종 크고 작은 국제대회 유치를 독식하기 위한 작은 시련에
불과했다. 이후 중국은 2001년 7월에 2008년 베이징올림픽, 2002년 12월에 2010년 상하이세계해양박람회 유치에 성공한데 이어
2004년 7월에는 2010년 광저우(廣州)아시안게임 유치권도 따냈다. 또 2007년 창춘(長春)동계아시안게임 유치를 앞두고 있으며 2018년
동계올림픽에 헤이롱장(黑龍江)성의 하얼빈도 유치신청을 할 전망이다.
이 밖에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위원회 총회와 미스월드
선발대회, 심지어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까지도 줄줄이 중국에서 열리고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우리는 여수가 2010년
해양엑스포개최권을 상하이에 넘겨줘야 했고 고구려문화유산은 국제적으로 중국의 것으로 공인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중국이 각종
국제대회의 블랙홀로 떠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 거대시장을 앞세운 중국이 급성장하며 국가적 위상이 높아진 것이 가장 주요한 원인이다.
여기에 유럽 선진국이 독식하던 대회를 형평에 맞게 분산개최하자는 목소리가 맞물리면서 중국은 국제대회 유치의 겹 경사를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유치권 경쟁에서 보여주는 중국의 막강한 정부지원과 자금력이다. 2010년 국제박람회 유치전이 벌어질 때도
중국은 개발도상국에게는 전폭적인 무상 경제원조를, 선진국에게는 거대시장을 은근히 과시하며 시장개방을 무기로 표를 끌어 모았다. 지방정부 차원의
지원으로 그나마 지역이기주의에 분열된 힘으로 유치 경쟁에 뛰어드는 우리로서는 중국이 버거운 상대가 될 수밖에 없다.
외교적 정성 · 노력 성과…경제적 효과 · 고성장
'성장엔진'
1993년 9월 23일의 유치실패의 아픈 경험을 2001년 7월 13일의 유치성공으로 바꾸어
놓기까지, ‘초상집분위기’의 베이징을 ‘춤추는’ 베이징으로 탈바꿈 시키기까지 중국정부가 얼마나 많은 외교적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인권상황이나 각종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고 그것을 이유로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보이콧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려오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중국은 스스로의 약점을 시장의 매력이나 발전 잠재력 등으로 메워가면서 자신들이 상정한 목표를 달성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88올림픽과 2002월드컵을 통해 세계적으로 우리나라를 알리고 국민통합과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던
것처럼 중국의 각종 국제대회 개최는 중국인들의 시민의식을 제고 시키고 부족한 사회 간접시설을 확충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며 상당 액수의 경제적
효과를 창출해 내며 고성장을 거듭하는 중국에게 또 다른 성장엔진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앞으로도 각종 국제대회 유치에
뛰어 들 것이고 중국이 뛰어든 유치 경쟁에서 중국의 거대시장을 공략해야 하는 세계 각국들이 중국에게 반대표를 던지기가 쉽지 않은 분위기는
당분간은 더 지속될 것으로 보여진다.
(국정브리핑 / 김대오 국정넷포터 2005-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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