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사 새로보기] 한민족(1)
오늘날의 일본인은 신석기문화의 주인공인 조몬(繩文)인과 청동기 문화
주인공인 야요이(彌生)인의 결합으로 이뤄졌다. 일본에서 얘기되는 ‘일본 민족의 단일성’은 청동기 시대 이후 구성원의 혈통상 커다란 변화가 없었던
데다, 집단정체성 인식이나 역사의식에서 공통분모가 있었으리라는 추정에 의해서 가능하다. 19세기 들어서야 일본 역사에 편입된 오키나와(沖繩)의
류큐(琉球)인이나 특별보호의 대상이 돼 있는 아이누족은 그런 전체적인 동질성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 예외적 요소로 여겨진다.
그러나 일본인의 집단정체성 인식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한 일본 전국의 통일과 조선침략(임진왜란) 이후에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또 그 이후에도 도쿠가와(德川) 막부의 일본 통치가 강력한 중앙집권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 전국을
아우르는 분명한 집단정체성 인식은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의 근대화 과정에서 제자리를 잡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지금도
일본인들은 ‘고향이 어디냐’를 물을 때 ‘후루사토’(鄕里)를 묻기도 하지만 ‘오쿠니’(お國)를 묻는 일이 많다. 외국인에게 ‘오쿠니’를 물을
때는 어느 나라 출신이냐를 묻는 것이고, 일본인에게 물을 때는 고향을 묻는 것이라고 나누어 이해하면 되지만 원래는 똑같이 ‘나라(국가)’를 묻는
것이었다. 물론 이 때의 ‘오쿠니’는 메이지 유신 이전의 번(幡)을 단위로 한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의 나가노(長野)현은 과거
‘시나노’(信濃)번 지역이다. 따라서 옛날에 ‘오쿠니’가 어디냐고 물으면 당연히 ‘시나노노쿠니’(信濃國) 출신이라고 밝혔고, 지금은 ‘나가노현’
이라고 대답한다. 이는 봉건제의 지방분권적 성격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민족 단위의 역사 인식이 정치적 의미를 띠기 시작할 때야 비로소
‘민족’ 인식이 태어난다는 세계사적 보편성과도 통한다. 그런 민족 의식의 탄생은 대체로 자연스러운 과정이기보다는 지배층의 적극적 의도, 즉
근대적 부국강병의 기초조건으로서 필요성이 커진 ‘국민ㆍ민족 건설’ (Nation Building)의 결과이다.
한국에서의 민족
인식도 다를 바 없다. ‘반만년을 이어온 배달민족’이나 헌법 전문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대한국민…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에서 ‘민족’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구한말의 외세 침탈, 보다 직접적으로 일제 식민지 지배의 직접적 산물이다.
앞서 조선시대나 고려시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도 있었을, 안팎을 구분하는 ‘우리’ 의식조차 몽골 침입 등 외부로부터
정치ㆍ군사적 압력에 대한 정치권력의 위기 의식을 배경으로 한 가공(架空)의 의식일 가능성이 크다. 또 바닥 민중의 경우 그런 안팎 구분의 경계는
‘민족’을 단위로 하기보다는 신분을 단위로 이뤄졌고, 지역적 공동체 의식의 경우도 생활근거에 대한 위협이 인식의 주된 출발점이었다는 주장이 날로
힘을 얻어가고 있다.
민족의식의 이런 가공성은 혈연공동체 의식에서 한결 두드러진다. 일본의 경우 조몬인과 야요이인의 결합이라고
편하게 얘기하지만 실제 내용은 청동기를 가진 우세한 외래집단과 토착집단의 지배-복속이다. 또한 야요이 시대 후기에 광범위하게 이뤄진 정치적
통합과정은 우세한 철기문화 집단에 의한 또 한 차례의 지배-복속이었다.
따라서 어느 일본인이 지배층의 이야기인 일본 고대사를
‘일본민족의 역사’, 또는 ‘우리역사’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엄밀하게는 그가 혈통상 그 지배층, 즉 일본 토착세력이 아닌 외래 종족의 후손이어야
한다.
이를 가리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 조건은 한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한민족 구성원의 혈연적 공통성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거의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현재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한민족의 역사’는 결코 통일신라 시대를 출발점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더욱이 한민족사의 출발점인 단군신화는 물론이고, 고구려나 백제, 심지어 신라나 가야의 건국설화도 핵심 내용은 모두 우세한
정치ㆍ군사력을 가진 외래집단이 토착세력을 복속하거나, 압도적 힘을 배경으로 토착세력을 끌어들여 중심-주변의 지배권 분담을 이루는 과정이다.
단군신화를 예로 들어 보자. 단군신화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의해 그 내용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단군신화는 특정한 역사서의 이름일 수도 있고, 일반적으로 오래 된 기록일 수도 있는 ‘고기(古記)’를 근거로 하고 있다. 모두들
알고 있는 내용이겠지만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다. ‘옛날에 (하늘을 다스리던) 환인(桓因)의 서자 환웅(桓雄)이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받고,
3,000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신단수 밑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었다. 그가 환웅 천황이다. 환웅 천황은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인간세계를 다스리고 교화했다.
참을성 있게 시험을 이겨내고 인간이 된 곰을 임시로 취했더니 아들을 낳았다.
그가 단군 왕검으로 요(堯) 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 만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조선(朝鮮)이라 불렀다.’
한편으로 ‘본기’(本紀)를 인용한 ‘제왕운기’의 내용은 단군의 혈통이 조금 다르다. ‘상제 환인의 서자 웅이 천부인 세 개를
받고, 귀신 3,000을 이끌고 신단수 아래에 내려왔다.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이 되게 해 박달나무신과 결혼시켜 아들을 단군을 낳게 했다.
조선 땅을 차지해 왕이 되었으니 신라, 고구려,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와 맥이 모두 단군의 자손이다.’
두 기록의 신화는 단군의
천신의 직계손인지 외손인지의 차이는 있지만 천부인 3개, 3,000의 무리 등은 일치한다. 이것이 단순한 설화가 아니라 어떤 역사적 사실을
미화한 것이라면 추정 가능한 역사 사실은 비교적 간단하다. ‘천신숭배사상을 가진 북방세력의 한 갈래가 지배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3종의
신물(神物)을 지니고, 3,000명의 날랜 병사를 이끌고 들어와 토착집단과 제휴해 나라를 세웠다.’ 즉, 곰 토템을 가진 토착세력의 여자를 취해
아들을 낳게 한 것과 손녀를 종교적 권위를 가진 토착세력 지도자와 결혼시켜 아들을 낳게 했다는 차이는 있지만 외래세력이 토착세력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 나라를 만들었다는 기본 사실은 차이가 없다.
이는 고구려 건국 설화인 주몽(朱夢) 설화, 즉 동명성왕(東明聖王)
설화에 주몽이 천제의 손자이자 하백(河伯)의 외손으로 나타난 것과 거의 같은 구조다. 천신의 후예가 원래의 근거지에서 나와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근거지, 나라를 세우는 과정이다. 고구려 건국설화가 부여의 한 갈래가 고구려를 세웠다는 이야기라면, 백제 건국 설화는 고구려의
한 갈래가 백제를 세웠다는 내용이다. 모두 토착세력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사의 모든 단계에서 ‘일본민족사’를 쉽사리
거론하기 어렵듯 한국에서도 ‘한민족의 역사’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다. 환웅이 우세한 청동제 무기를 갖춘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왔을 때 이에 저항하다가 끝내 굴복한 토착세력을 ‘민족사’에서 배제할 수 없고, 주몽이 부여에서 남하해 고구려를 세울 당시의 토착민, 온조와
비류가 고구려를 떠나 남쪽에 나라를 세웠을 때의 토착민 등도 마찬가지다. 나는, 또는 당신은 이때 정복한 쪽의 후손인가, 복속된 쪽의 후손인가.
그런 구별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역사가 한참 흐른 후의 일이다. ‘삼국유사’나 ‘제왕운기’가 몽골 의 고려 침략 이후에 씌어졌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쩌면 일제의 식민지 강점이 신채호나 박은식의 민족사관을 낳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집단정체성의 근거를 과거의 역사에서 찾아야
할 강한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제왕운기’는 고조선 이후에 한반도에서 일어났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 모든 세력집단을 ‘단군의
자손’이라고 명기했다. 발해를 빠뜨린 것이 우연한 일인지, 구성 종족집단의 차별성을 인정한 결과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제왕운기’는 오늘날
우리가 가진 ‘한민족’ 의식의 직접적 근거가 되어 있는 것이다.
(주간한국 / 황영식 논설위원 2005-7-14)
[한·일 관계사 새로보기] 한민족(2)
일반적으로 ‘민족’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민족의 외연을 되도록 넓히려는 경향이 강하다. 민족의 자부심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한 아득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혈연적 공통성을 추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것이 특정의 역사 경험을 전제로, ‘선택적’ 으로 이뤄지고, 혈연적
공통성과 역사의식이라는 민족의식의 양대 기둥 사이를 수시로 오간다는 점이다.
치우(蚩尤) 이야기를 예로 들어 보자.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 당시 ‘붉은 악마’의 심벌마크로 귀면와(鬼面瓦)에서 봐 온 도깨비 형상을
닮은 치우의 모습이 등장한 이래 일반인 사이에서는 치우가 역사상 실존했던 ‘한민족의 조상’이란 인식이 조금씩 굳어져 가고 있다.
중국 신화에는 3황5제의 하나인 황제헌원(黃帝軒轅)이 신농(神農)을 몰아내고 천하를 장악할 당시 신농을 따르던 치우라는 맹장 때문에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기’(史記)와 ‘산해경’(山海經) 등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치우의 형제는 81명으로 하나같이 날래고 용맹했다.
치우는 구리 머리와 쇠 이마를 갖고 쇳가루와 모래를 먹었으며 풍백과 우사를 거느리고 천지조화를 부렸다. 황제는 탁록(涿鹿)이란 들에서 벌어진
최종 결전에서 응룡(應龍)의 도움을 받고, 지남차(指南車ㆍ자석?)를 이용해 치우를 죽이고 천하를 차지했다.
이 신화에서 중국 상고대 정치권력 탄생 과정을 읽어 내려 한다면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한 중원의 정치세력이 동북방 세력과 한 차례 패권을
겨루었으며, 강성한 동북방 세력을 지혜로써 물리쳤다는 줄거리 정도를 추출할 수 있다.
이런 줄거리는 위서(僞書) 논쟁이 끊이지 않는 환단고기(桓檀古記)에선 전혀 달라진다. 치우는 배달국 14대 천왕인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으로 BC 2,707년에 즉위해 109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6개의 팔과 4개의 눈, 소의 뿔과 발굽, 구리 머리와 쇠
이마를 하고 있었다. 70여회의 전쟁에서 한 번도 지지 않았고, 신농(神農)을 무찌르고, 12개 제후국을 병합하고, 헌원을 황제에 임명했다.
그러나 환단고기의 이런 내용은 객관적 역사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 중국 신화와 마찬가지로 치우를 ‘구리 머리, 쇠 이마’로 묘사했는데 이런
기술은 기본적으로 철기문화가 보편화한 후에나 가능하다. 쇳가루와 모래를 먹는다는 내용은 주물 제조과정을 상징한 것으로, 이 또한 철기문화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다.
더욱이 신화가 묘사한 대규모 전쟁은 그를 수행할 정치세력, 즉 사회적 분화가 크게 진전된 이후의 일이어야만 한다. 최소한 청동기 문화가
무르익고 난 후에야 세속적 이해를 다투는 전쟁이 가능했다. 그런데 중국과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의 철기 연대는 BC 400년 선을 넘지 못하고
있다. 또 중국의 경우 최근 청동기 연대가 BC 3000년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으나 본격적 청동기 문화의 연대는 여전히 BC 1500년
무렵으로 상정돼 있다. ‘사기’의 치우 신화 자체가 철기문화가 꽃핀 춘추전국시대 이후의 상상력으로 전설을 포장한 결과이다.
한편으로 치우 신화는 중국과 주변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치우는 중국에서 오랫동안 전쟁의 신, 또는 군신(軍神)으로 여겨져
왔다. ‘사기’에는 한(漢) 고조 유방(劉邦)이 천하에 뜻을 두고 몸을 일으킬 때 치우에게 제사 지내고, 피로 북과 깃발을 붉게 칠했다는 기록이
있다. ‘붉은 악마’와 마찬가지로 치우의 상징색인 붉은 색에서 승리의 힘을 얻고자 한 것이었다. 당시 치우가 한족에게도 섬김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이민족이란 분명한 의식이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또 환단고기가 치우를 배달국 14대 천왕, 즉 한민족이 가장 강성했던 시절의
제왕으로 자리매김했듯 중국 남방 먀오(苗)족 신화에서는 치우가 먀오족의 상고대 국가인 구려(九麗)의 왕으로 등장한다. 이는 치우가 특정 민족의
전쟁영웅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여러 민족 공통의 군신이거나, 전쟁영웅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일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치우를 굳이 한민족의 조상으로 자리매김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먀오족이 말하는 ‘구려의 왕 치우’에서 구려는 나중에 고구려를
가리킨 구려(句麗)나 고려(高麗)와 비슷한 말이다. 일본에서 지금도 고려를 ‘구리’라고 하는 데서 보듯, 고음 ‘구리’를 나타내는 다양한
음차(音借)의 하나일 뿐이라고 볼 수 있다. 구이(九夷)도 다르지 않다. 따라서 먀오족 신화는 중국 남방으로 흘러 들어간 동이족 일파의
영웅신화가 먀오족의 신화로 현지화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동이족의 중심인 한민족의 가상 역사 공간이 중국 남방으로까지 넓어지는
효과도 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적지 않는 문제가 있다.
전에도 자세히 언급했듯 ‘동이족’은 중국 상고사의 중요한 구성 요소였으나, 주(周) 이래 중국사에 편입돼 독자적 의미를 상실한 좁은 의미의
동이족과 만주와 한반도, 일본 열도 등 중국 주변부의 다양한 종족집단을 통칭한 넓은 의미의 동이족이 있다. 흔히 한민족과 동의어로 쓰는 동이족은
후자의 한 부분이다. 이를 혼동하면 ‘한민족=동이족’의 범위, 즉 정체성의 중심요소에 대한 적지 않은 혼란이 빚어진다. 민족 자존심을 높이기
위해 범위를 넓혀 가다보면 경계선이 흐려지고, 나중에는 경계를 설정하는 행위, 즉 민족 인식의 의미 자체가 사라진다. 외형부터 우리와는 크게
다른 먀오족으로까지 영역을 넓힌다면 한민족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혈연적 연관성을 찾는 데 치중하다 보면 더욱 중요한 ‘공통의 역사의식’이란 기준이 흔들린다는 점이다. 치우 신화를
공유한 과거의 집단 사이에서 어떤 혈연적 연관성을 찾을 수 있고, 심지어 사촌 같은 존재였다고 해도 지금 우리의 민족의식으로 그런 집단의
후손들을 같은 민족으로 싸 안기는 어렵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지금부터 3,000년 전에 용력과 지혜가 뛰어난 한 아들이 가족과 종족을 떠났다고 치자. 그는 장자가 아니었기에 본거지에서 재산과 힘을
이어받기 어려웠다. 그래서 한 단계 문화 수준이 낮은 지역을 치고 들어가 토착민을 지배하거나 그들과 손잡고 새로운 세력기반을 구축했다. 그의
아들과 그 후손들은 이를 이어가면서 토착민들과 끊임없이 섞여 들어간다. 그렇게 형성된 집단은 외래의 영웅인 그를 신화의 주인공으로 삼는다. 한
500년쯤 세월이 흐른 후 이 집단의 영역이 그가 500년 전에 떠나온 집단과 경계가 닿는다. 지배층만을 놓고 보면 두 집단의 흐릿한 혈연관계를
추정할 수 있지만 집단으로서 그런 의식을 가질 이유가 없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500년 동안 두 집단의 역사경험이 달라서 전혀 별개의
역사의식을 가졌다는 점이다. 필연적으로 충돌과 전쟁이 빚어지지만 두 집단 가운데 어느 누구도 상대 집단과 ‘한 뿌리’임을 주장할 이유도, 의미도
없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 고려와 몽골의 전쟁, 임진왜란 등이 모두 그랬다.
다만 아주 특별한 필요가 있을 때만 그런 주장이 가능함은 일제가 조선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끄집어 낸 ‘동조(同祖)론’의 예를 들
수 있다. 아무리 직접적 혈연관계라 하더라도 일단 방계로 갈라져 세월이 흐르고 나면 그 후손들 사이에서 ‘같은 조상’ 의식을 기대할 수는 없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시 합류해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런 의식이 싹틀 수는 있지만 그것은 합류 이후 새롭게 형성된 동류의식일 뿐이다.
최근 더러 듣게 되는 ‘훈족의 영웅 아틸라 대왕은 한민족’이란 주장도 마찬가지다. 고대 유럽을 뒤흔든 훈족과 흉노족의 관계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들이 한족에 밀려 이동하기 전 한민족의 조상과 상당한 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란 추정도 가능하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어느 한때 형제
사이였다고 해도 세월이 흐르면서 수많은 외래 인자가 흡입된 결과 두 집단은 완전히 다른 집단이 됐다. 역사의식을 따질 것까지도 없다. 훈족의
후예라는 헝가리인들과 한국인을 비교해 보면 그만이다. 만주족, 몽골족과 한민족의 관계도 거슬러 올라가면 훈족과 다를 바 없다. 그러니
‘누루하치는 한민족’ ‘칭기즈칸은 한민족’ 등의 주장이 나오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주간한국 / 황영식 논설위원 2005-7-22)
[한·일 관계사 새로보기] 한민족(3)
한민족의 기원과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있지만 대체로 기원전
10세기 무렵 예(濊)ㆍ맥(貊)ㆍ한(韓)족의 등장과 함께 큰 줄기가 형성됐다고 보면 무리가 없다. 물론 이 무렵에 예ㆍ맥ㆍ한족이 어떤 공동체
의식을 가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식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나 가능했을 것이고, 그 또한 피지배층을 아우르지 못한
반쪽의 의식이었음은 앞에서 밝힌 바 있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신문왕 12년조의 ‘선왕 춘추는 자못 어진 덕이 있었고, 김유신을 얻어 한
마음으로 정치를 하여 삼한을 통일(一統三韓)하였으니…’라는 기록을 근거로 이미 삼국시대에도 동류(同類) 의식이 있었다는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이 기사는 삼국통일 이후 신라 지배층의 정통성 주장에 다름 아닌 내용이며, 공동체 의식을 강조해야 했던 고려 말에 씌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당시 신라인의 진정한 민족의식을 드러낸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더욱이 신라 백제 고구려 3국이 수시로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을 거듭했고, 당나라의
힘을 빌려 ‘적’을 타도하는 데 힘을 쏟았던 것이 역사의 실상이다.
또한 한민족의 형성을 기원전 10세기 무렵에서 찾으려는 것은
그때 형성된 하나의 집단이 분열과 통합을 거듭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는 뜻이 아니다. 거꾸로 현재 우리가 가진 민족의식이란 그릇에 담긴
다양한 요소의 연원을 더듬어 올라가, 그릇 밖으로 넘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확장해 본 결과라는 뜻이다.
중국 문헌에 보이는
‘예맥’은 그것이 각각의 종족집단이나 그 거주지역을 가리킨 것인지, ‘예’와 ‘맥’을 합쳐 부른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초기의 기록에는 예와 맥을
따로 기록했지만 나중에는 둘을 합쳐서 부르는 예가 많았다. 예와 맥을 합쳐서 ‘예맥’으로 표기한 경우에도 그것이 반드시 하나의 종족집단을 가리킨
것으로 보긴 어렵다. 예를 들어 ‘발조선’(發朝鮮)을 발과 조선으로 나눠 보면서 예맥은 꼭 하나로 묶어 봐야 할 이유가 없다. 더욱이
‘예맥’이라 합쳐 부른 최초의 문헌인 ‘관자’(菅子) 소광편(小匡篇)에는 별도로 맥이 언급돼 있기도 하다. 기원전 7세기 무렵의 일이다.
이는 기원전 12세기 무렵의 일을 기록한 ‘일주서’(逸周書) 황회해편(王會海篇)에 나오는 ‘예인’(濊人), 직방해편(職方海篇)과
‘주례’(周禮) 직방씨편(職方氏篇)에 각각 보이는 ‘9맥’(九貊)이란 표현을 통해 사정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당시 예인이 주나라 주변 종족
대표의 하나로 언급된 것은 그들이 이미 상당한 수준의 집단통합을 이루었음을 보여준다. 반면 ‘9맥’이 꼭 ‘9개 집단’으로 나뉘어 있던 맥족을
가리킨 것은 아니겠지만 예족과 달리 맥족은 미통합 내지 분열 상태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추정은 맥족이 주로 북쪽의 세력으로 설명되는
점, 기원전 2세기 무렵의 일을 기록한 ‘한서’(漢書)에 나오는 ‘호맥(胡貊) 땅은 그늘 쌓인 곳에 나무 껍질이 세 치, 얼음 두께가 여섯
자다. 사람들은 고기를 즐겨 먹고 짐승의 젖을 마시며, 새와 짐승의 털로 빽빽한 옷을 입고, 추위를 잘 참는다’는 기록 등을 통해서도 보강된다.
오늘날 몽골 북부의 삼림지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유목과 수렵 중심의 생활을 영위하던 종족이었기 때문에 통합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기원전 7세기 이전에 예족과 맥족은 ‘예맥’으로 불릴 정도로 경계를 접했거나, 단일 연합체로서 통합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맥족의 중심세력에 한정된 것일 뿐 기원전 2세기까지도 독립된 맥족의 계통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초기에는 예는
중국 동북방에서 내몽골에 이르는 지역, 맥은 현재의 샨시(陝西)성 북쪽 지역에따로 존재했으나 기원전 7세기 이전에 동쪽으로 이동해 예는
랴오둥(遼東) 지역, 맥의 주류는 랴오시(遼西) 지역에 자리를 잡고 활발한 융합기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흔히 고한민족의 고고학적
출발점으로 여겨지는 비파형 동검문화가 랴오시, 랴오둥 지역에서 상당히 차이가 나는 것과도 어느 정도 부합된다.
그 융합의 대표적인
결과가 고조선이며, 고조선의 건국으로 예와 맥의 구분은 별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됐다. 고조선의 통합력이 약해져 부여, 고구려, 동예, 옥저 등이
일어날 때 부여와 동예는 예, 고구려와 옥저는 맥이 중심세력을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단계에서는 지배층이 내세우는 계보의 문제일 뿐
기층세력은 그냥 ‘예맥’이었다고 봐도 문제가 없다.
다만 지배층의 정치적 주도권을 놓고 볼 때는 상대적으로 맥족이 우세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했듯 치우 신화는 한족(漢族) 세력이 탁록 벌판에서 치우가 상징하는 주변 세력과 크게 싸운 일을 다루고 있다. 치우 세력의
지리적 위치는 맥족의 근거지인 랴오서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치우 형제가 81명이란 얘기도 맥족이 형제적 지배 구조를 갖고 있었던 사실과
淪磯? 맥족의 나라인 고구려의 초기 관직인 형(兄), 대형(大兄), 태대형(太大兄) 등은 맥족이 형제적 질서를 중심으로 정치세력을 형성했던 한
흔적이다.
치우라는 말 자체가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더듬게 한다. 고구려 시조인 주몽(朱蒙)은 ‘활 잘 쏘는 사람’이란 뜻이다.
광개토대왕비문은 주몽을 ‘추모’(鄒牟)라고 썼다.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는 ‘추(鄒)는 동이족 말이며 주루(붉을 朱+ 우부 방, 婁)라고
쓰기도 한다’고 풀이했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도 했다고 적었다. 한자어인 무신을 고구려
고유어로는 ‘주류’라고 했음을 알 수 있고, 그 한자음은 설문해자주의 ‘주루’와 발음이 거의 같다. ‘주루=추(鄒)’라면 ‘추=치우’는 결국
무력이 뛰어난 영웅, 즉 무신을 뜻하는 맥족의 말인 셈이다.
한편으로 치우 신화와 고구려는 고조선 건국 설화를 매개로 연결되기도
한다. 치우 신화에는 풍백과 우사가 등장한다. 단군 설화에 나오는 풍백, 우사와 같다. 단군 신화에는 운사가 추가됐을 뿐이다. 그런데 중국
산둥(山東)성 자상(嘉祥)현에서 발견된 우(武)씨 사당 화상석(畵像石)에도 삼부인과 풍백, 우사, 운사, 곰과 호랑이 등 단군 설화의 내용이
거의 그대로 담겨 있다. 서기 147년에 만들어진 사당이어서 이때는 이미 단군 설화가 완성된 형태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단군
설화는 백두산을 영산(靈山)으로 여기는 만주족 등 주변 종족집단의 기원 설화와 내용과 구조가 비슷하다. 중국 동북지역과 만주 일대에 널리
퍼져있던 넓은 의미의 동이족 신화의 변주(變奏)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의 동명성왕 설화가 단군 설화와 기본구조가 같은 것도 고구려 지배층이
단군 설화와 그를 거슬러 올라간 치우 신화를 채용해 조합한 결과일 것이다. 건국 설화가 기본적으로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고구려
지배층은 고조선 중심세력과 궤를 같이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고조선과 고구려 건국설화는 모두 무력이 우세한
외래 집단의 이동을 그리고 있다. 유이민과 토착종족의 결합, 또는 지배 집단과 피지배 집단의 타협을 반영한 것으로 유이민 지배 집단을 중심의
변화를 그렸다. 이런 점에서 두 설화가 모두 농경생활에 빨리 익숙해진 예족보다는 늦게까지 유목?수렵 생활을 영위한 맥족 중심의 서사라고 할 수
있다.
고조선의 기층을 형성한 예맥족은 먼저 한반도에 들어와 정착해 있던 한족(韓族)과 다양한 관계를 맺었고, 그 결과로서
오늘날의 한민족이 형성됐다. 이는 일본 열도에 먼저 살고 있던 조몬인과 한반도에서 건너간 야요이인들이 결합해 오늘날의 일본 민족을 이룬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한반도에 먼저 들어와 있던 한족은 누구였을까.
(주간한국 / 황영식 논설위원 2005-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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