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영토확장 I
우리 역사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고구려, 드넓은 대륙을 말달리며 동북아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 힘센 나라를 만들었던 고구려는 우리 역사에서
단연 빛나는 시기였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주변 국가들과 전쟁을 벌였다. 첫 번째는 건국자인 주몽부터 시작해서 본격적으로는
대무신왕 때 시작된다. 이때는 주변에 있는 조그만 소국들을 정복하고 가까이 있었던 한족들을 바깥으로 내모는 전쟁이었다. 2단계는 광개토대왕,
장수왕 시기로 고구려가 동서남북 전방위로 공략작전을 펴면서 영토를 최대로 넓힌 시기가 되겠다. 그리고 세 번째가 이미 동아시아 패권 자리를
장악하고 약 2백 여년 이상 유지해온 고구려와 신흥 제국인 수.당과의 전쟁이 되는데...”(고구려 연구회 윤명철 교수)
졸본에
고구려를 세운 주몽은 제일 먼저 비류국을 정복하고, ‘다물도’라고 이름을 붙였다. 다물이란 고구려말로 ‘옛땅을 찾는다’는 뜻으로 고조선의 옛
땅을 되찾는다는 의지를 선언한 것이다.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이기 때문에 같은 계승국가들을 정복할 필요가 있었다. 예를
들면 비류국이라든가 양맥국이라든가 개마국 등이 있었고, 나아가서는 고구려의 근원이면서도 고구려의 정복대상이 되는 부여국가의 관계였다. 부여국도
정벌하기 위해서 초기부터 전쟁을 벌였다.”(윤명철 교수)
고구려 제 2대 왕인 유리왕은 아버지 주몽의 뜻을 이어받아 고구려의
영토확장을 위해 거대한 일을 꾸미고 있었다. 바로 도읍지를 옮기는 일. 서기 3년, 유리왕은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기게 된다. 국내는
지금의 압록강 북쪽에 있는 중국 집안 지역으로 땅도 기름져 농사짓기에 적합하고,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적을 방어하기에 좋았다.
“여기는 철이 풍부했다. 이 철이라는 것은 고대 국가가 강성대국으로 발전하는데 아주 필수 불가결한 자원이다. 바로 이것이 이웃과
주변을 정복할 수 있는 무기화가 되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신여대 사학과 이현희 명예교수)
천연의 요새와 비옥한
땅, 풍부한 철 이외에도 유리왕이 국내성을 두 번째 도읍으로 삼게된 이유는 바로 압록강에 있었다.
“국내성은 바로 압록강 옆을
지나고 있다. 그러니까 압록강을 통해서 고구려 사람들은 황해로 진출하면서 국제적 질서 속에 진입할 수가 있었던 것. 이것이 고구려의 수도를 옮긴
가장 큰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윤명철 교수)
고구려가 국내성에 도읍했던 400여 년 간은 고구려 역사에서 가장 번성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이 곳에는 아직도 광개토대왕릉비를 비롯한 고구려의 역사적인 유적과 유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고구려가 국내성을
기반으로 계속 영토를 넓혀 나가자 주변 나라들은 두려움을 느끼게 됐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고구려를 침략했다. 고구려의 가장 껄끄러운 상대로는
북쪽의 부여와 서쪽의 요동과 한나라, 남쪽으로는 낙랑이 있었다. 특히 부여의 왕 대소는 고구려의 시조가 부여에서 시작됐음을 강조하며, 예를 갖춰
섬길 것을 요구한다. 고구려가 거부하자, 대소는 고구려를 침범한다. 유리왕의 셋째아들인 무휼은 오히려 부여군을 기습해 크게 물리쳤다. 그때
무휼의 나이, 불과 열살이었다. 무휼은 열 다섯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바로 그가 고구려 3대왕인 대무신왕이다.
“대무신왕은 활과 사냥에 뛰어난 솜씨가 있었다.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부왕 유리왕을 도와서 주위에 있는 대소 국가들을 모두
정복을 해서 고구려 팽창의 기초를 닦은 왕이다.” (이현희 교수)
대무신왕이 왕위에 오른지 4년째인 서기 21년. 본격적인 부여
정벌에 나선다.
“대무신왕의 여러 가지 업적중에서 가장 큰 것은 역시 부여 정벌이다. 고구려는 그 시원이 부여에서 시작된다.
북부여의 아들인 주몽이 나라를 세웠고, 북부여에서 도망을 왔기 때문에 부여와 고구려의 관계는 갈등과 적대관계였다. 특히 그 당시에는 부여가
강국이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대무신왕으로 봐서는 고구려를 팽창시키기 위해서 가장 먼저 선결해야할 과제가 역시 북쪽에 있고, 시원국가인 부여를
정벌하는 것이었다.” (윤명철 교수)
이때의 전쟁으로 대소가 죽자 부여의 국력은 크게 쇠약해졌다. 대무신왕은 부여의 힘이 약해지자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정복하며 영토를 확장해갔다. 특히 대무신왕은 타고난 전략가였다. 서기 28년, 고구려의 성장을 두려워하던 한나라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오자, 성문을 굳게 닫고 지구전을 펼쳐서 싸우지 않고도 적을 물리치기도 했다. 대무신왕의 지략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고구려가 자신보다 군사력이 강한 나라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쟁에서도 매번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역시
고구려인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군사적인 무기는 말이다. 또 고구려의 활과 화살은 워낙 뛰어났다. 또 고구려는 산성의 나라다. 이른바 축성술이
뛰어났기 때문에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처럼 장기 농성전에 능했다. 이러한 군사적인 기술적인 측면과 함께 고구려 인들이 적에게 항복하지 않으려는
자유정신이 결국은 고구려가 주변 국가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윤명철 교수)
부여를
정벌하고 북쪽의 유목 민족들을 차례로 정복한 고구려는 이제 남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어느 여름날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왕자가
옥저로 유람을 가게됐다. 호동왕자는 첫눈에 보기에도 총명해 보였고 용모가 수려하여 보름달이 중천에 뜬 듯이 환하였다. 이때 호동을 본 낙랑왕
최리는 그가 고구려의 왕자임을 단번에 알아보고 사위로 삼을 생각으로 궁중으로 데려오게 된다.
최리의 딸인 낙랑공주를 만나 사랑에
빠진 호동왕자는 낙랑공주와 백년가약을 맺게 되고.. 부왕의 허락을 받아, 정식으로 혼인을 올리자며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낙랑 공주는
매일 매일 애타게 호동왕자가 소식을 전해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호동이 소식을 전해왔다.
낙랑에는 적이 쳐들어오면
위험을 알리며 스스로 소리를 내는 ‘자명고’ 라는 북이 있었다. 그래서 다른 나라들도 낙랑은 함부로 침범하지 못했다. 그런데 호동왕자는
낙랑공주에게 낙랑의 보물인 ‘자명고’를 없애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낙랑공주는 사랑하는 사람의 뜻을 따를 것인지 나라를 버려야 하는 지
고민하다 어느 날 밤 몰래 무기고로 들어가 자명고를 찢어 버리게 되고, 호동은 고구려 군사들을 이끌고 낙랑으로 쳐들어온다. 고구려군이
쳐들어왔는데도 자명고가 울리지 않아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한 최리는 자명고를 찢은 것이 딸의 소행임을 알고 크게 분노하여 낙랑공주를 죽이고
마는데.. 고구려군을 이끌고 낙랑으로 온 호동은 낙랑 공주부터 찾았지만 공주는 이미 싸늘한 시체로 변한 후였다. 호동왕자는 낙랑 공주의
죽음을 슬퍼하다 자결하고 만다. 이때 항복한 낙랑국은 5년 뒤에는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고구려의 낙랑국 정복은 호동왕자과 낙랑공주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로도 유명하지만 북서로 영토를 확장해가던 고구려가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갈 수 있는 거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결국 고구려가 영토확장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는데 그 중의 하나는 낙랑국이라고 볼 수 있다. 낙랑국의 위치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오늘날 평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국내성 지금 집안 통구 일대에서 여기까지는 상당한 거리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고구려는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간다는 하나의 신호로써 낙랑을 정복했다는데 큰 의미를 들 수 있겠다.”
(이현희 교수)
유리왕은 압록강 근처의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겨 고구려가 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하고, 대무신왕은 부여를
정벌하고, 낙랑국을 멸망시켜 고구려 영토확장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 뒤에도 고구려는 줄기차게 정복전쟁을 벌이게 된다. 고구려가 건국한지 백
여년이 지난 1세기 끝 무렵, 고구려가 정복한 국가들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12개국에 이르는데... 옛 땅을 되찾기 위한 고구려의 영토확장은
계속된다.....
고구려의 영토확장 II
중국 길림성 집안현. 지난 400여 년 간 고구려의 도읍지였던 곳이다. 지금은 국내성이 잡초 속에 성벽의 일부만 남아있고, 장군총을 비롯한 만
2천 여 개의 고구려의 무덤들이 있는 집안, 이 곳에 한반도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정복했던 광개토대왕의 비가 서 있다. 6미터
39센티미터의 높이로 모두 천 7백 일흔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는 광개토대왕 비. 그 한자 한자는 천 오백 여년 전 고구려의 역사를 증언하는
소중한 기록으로, 현존하는 역사기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렇다면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어떤 내용이 새겨져 있을까?
“모두
세단계로 나와있다. 첫째 단계는 (고구려의) 건국 신화를 썼고, 두 번째는 광개토대왕의 대외 정복사를 강조했다. 세 번째는 왕릉 지킴이라든가
또는 관리 규정 그런 거를 뒀는데.... “(성신여대 사학과 이현희 명예교수)
광개토대왕의 신하였던 고구려 인들이 직접 보고 겪은
일을 그의 아들, 장수왕 시대에 기록한 이 비문에는 한민족사에서 최대 정복 군주로 꼽히는 광개토대왕의 영토확장 전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광개토대왕 당시 중국대륙에서 고구려의 세력판도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유적은 북한에 있는 덕흥리 고분이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유주 자사’ 진이었다. ‘유주’는 중국 황하의 북쪽 일대, 곧 북경과 요동 서쪽을 뜻하고, ‘자사’는 이곳을 관리하는 지방장관을
말한다.. 유주 자사 진이 사망한 해는 광개토대왕 18년으로 이는 광개토대왕 당시 고구려가 북경지역까지 최소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광개토대왕은 22년간 등극하면서 동서남북으로 정복활동을 펼쳤다. 북쪽으로는 지금의 요녕성에 있는 대안지역까지 정복을
했다. 그리고 이제 서북쪽으로는 지금의 심양 너머 시라모렌강 상류지역까지도 정복을 했다. 그 다음에 동쪽으로는 동부여를 정벌했는데 연해주지역의
일부로 보는 견해가 많다. 남쪽으로는 오늘날 삼척지역까지 차지했ㅐ1던 걸로 보인다.” (고구려 연구회 윤명철 교수)
광개토대왕은
압록강 북쪽 지역을 부챗살 모양으로 정복해 나가는 동시에, 남쪽의 좁은 지역은 수군을 동원해 바다를 통하여 공격하는 방식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광개토대왕이 왕위에 오르자 마자 제일 먼저 정벌에 나선 곳은 백제였다
“광개토대왕은 즉위하자마자 그 첫해에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했다. 그것이 유명한 관미성 전투다. 관미성은 현재 한강 하구지역으로 추정되는데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뒀다. 또 6년 뒤에 광개토대왕이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복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윤명철 교수)
그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은 백제와의 싸움에서 전사했다.
백제 정벌은 선대왕들의 한을 풀어주겠다는 광개토대왕의 의지의 표출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즉위한 해에 백제의 가장 중요한 요충지인 관미성을 함락
시키리라 마음 먹게 된다. 지금의 한강 하구로 추정되는 지역에 위치한 관미성은 바다로 둘러싸인데다가 사면이 절벽으로 이루어진 성채였다.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접경해있는 고구려와 백제에게 있어 임진강은 양국을 오갈 수 있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따라서 고구려가 백제를
치려면 본래는 임진강을 건너야 했다. 그러나 광개토대왕은 일반적인 통념을 깨고 강을 건너지 않았다. 전방에 있는 고구려 군대가 백제의 주력군을
공격해서 싸우는 동안 광개토대왕은 수군을 서해안으로 우회 상륙시켜 백제를 공격하는 작전을 폈다. 고구려 수군에 의해 급습당한 백제는
힘없이 무너지고, 고구려는 20일만에 관미성을 함락시켰다. 관미성의 함락은 서해 지배권이 고구려로 넘어간다는 것이자, 한강변에 위치한 백제의
수도 한성이 위험에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관미성을 함락한 광개토대왕은 서기 396년, 한강변에 있는 백제의 수도를 공격한다. 오늘날
풍납토성인 한성을 사면에서 포위한 광개토대왕의 총공세앞에 백제의 아산왕은 광개토대왕의 면전에 꿇어앉아 영원히 고구려의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한다.
이때의 백제와의 전쟁을 통해 고구려는 서해안 지역을 포함하여 한강 이북의 땅을 거의 대부분 차지하게 되었다. 광개토대왕은 공격뿐 아니라
방어에도 매우 뛰어났으며, 기병과 보병을 이끌고 대륙을 달린 것 만이 아니라 배를 타고 거대 병력의 해군도 훌륭하게 지휘했다. 광개토대왕의
전략전술 가운데 뛰어난 것은 바로 수군과 육군을 동시에 활용했다는
“이때 사용한 전술중에 가장 특이할만한 점은 수군 작전인데..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은 수륙양면 작전을 많이 활용했다. 광개토대왕이 직접 수군을 거느리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백제한성을 공격을 했다.
광개토대왕은 중국 연진을 공격할때도 수륙작전을 편 것으로 추정된다.” (윤명철 교수)
관미성 전투 이후 백제는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는 신하의 나라가 되었다. 그렇다면 신라와의 관계는 어땠을까. 그 열쇠는 충북 중원에 있는 고구려 중원비가 풀어 준다.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군이 신라를 점령해 신라가 구원을 청하자 광개토대왕은 군사 10만을 보내서 신라를 구원하게 된다. 그 이후에 신라의 왕들은
고구려 왕에게 책봉 내지 조공을 바쳤다. 특히 현재 충주시 외곽에 있는 중원 고구려비에 보면 바로 신라의 왕이 고구려 태자에게 와서 현지까지
와서 의책을 받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런 사실은 신라가 고구려의 강한 정치적 복속국가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명철
교수)
고구려는 한반도에서 백제와 신라를 정치적으로 복속, 그 영향력아래에 두게 된다. 그런데, 고구려의 이들 나라에 대한 지배
방식은 독특했다. 백제나 신라 모두 고구려를 종주국으로 섬겼지만 정치, 사회적인 체제는 그대로 인정을 받는, 간접 통치권 하에 있었다.
“고구려는 지정학적으로 보나 지리문화적으로 볼때 백제나 신라의 지배방식과는 틀렸다. 고구려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북방 유목 종족들은
직접 지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간접지배를 한다. 광개토대왕으로서는 굳이 완벽한 정벌이라기보다는 자기 질서 속에 편입시키는 작업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윤명철 교수)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광개토대왕의 본래 시호가 새겨져있다.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
여기서 ‘국강상’은 광개토대왕이 묻힌 언덕 이름을 말하고 ‘광개토경’은 땅을 넓혔다는 뜻의 광개토대왕의 업적. ‘평안’은 백성들이 편안하도록
다스렸다는 뜻, ‘호태왕’은 왕중의 왕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즉, 영토만 넓힌 왕이 아니라 내치에도 성공한 왕이라는 의미. 광개토대왕은 평양에
아홉채의 절을 세워 불교를 진흥하고, 벼슬제도를 새롭게 해 나라의 지배체제도 잘 갖추어 나갔다.
“이 비문에 보면 왕대에 나라가
부강하고 또 백성이 잘 살았기 때문에 군신간에 임금과 신하 간에 서로 교통이 잘 이루어졌고 그래서 신뢰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자연적으로 오곡이
무르익고 매우 풍요로웠기 때문에 자연히 국력이 신장되고 대외적인 기상이 넘치는 고구려로서 이미 중국에서도 굉장히 위협을 받을 만 했다고 볼 수
있다. “(이현희 교수)
광개토대왕이 외치와 내치 모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확보한 영토의 전략적 위치 덕분이기도 하다.
고구려와 백제가 1차로 황해도, 2차로 한강유역을 놓고 격전을 벌인 이유는 바로 이 안정적인 식량공급의 기지인 평야를 점령하기 위해서다. 또
나아가 중국과의 교역 통로를 장악하기 위해였던 것이다. 광개토대왕은 무작정 땅만 넓히는데만 골몰한 팽창주의자가 아니라 크게, 그리고 멀리 보는
전략가였음을 알 수 있다.
“광개토대왕이 즉위하던 5세기 초는 현재 21세기와 정치적, 경제적으로 상황이 유사하다. 그러니까
광개토대왕은 동아시아 신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자국을 그 중심부에 놓기 위해서 다양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한 대 정치가이다. 단순한 정복작전을
편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질서의 관점에서 거점을 확보하는 전쟁을 벌였다. 남쪽의 경기만을 장악했기 때문에 광개토대왕은 황해 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중심국가 될 수 있었다. 바로 단순한 영토를 넓힌 정복 군주가 아니라 당시 질서를 재편한 대 정치가임을 알 수있다.” (윤명철
교수)
드넓은 만주 벌판과 요동반도를 누비며 천하를 호령하던 광개토대왕.. 그는 대륙의 여러 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한 ‘왕 중의
왕’이었다.
(KBS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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