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의 개막, 백제와 신라의 탄생
기원전 37년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던 주몽이 북쪽의 작은 나라들을 정복하고 고구려를 건국한다. 주몽의 시대에 고구려의 영토는 지금의 러시아
블라디보스톡과 중국의 길림성으로부터 북한의 함경도와 청천강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그렇다면, 그 남쪽으로는 어떤 나라들이 있었을까.. 바로 백제와
신라가 있었다. 이 삼국은 왕권을 형성한 후 7세기 중반에 이를 때까지 치열한 전쟁을 벌여가며 이 한반도에 존재하게 된다
지난
11월2일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안쪽 옛 미래마을 터에서 왕궁과 같은 최고급 건축물에나 쓰일 수 있는 초석이 출토됐다. 초석이란 건물 주기둥을
떠받치기 위한 주춧돌의 일종. 그런데, 풍납토성에서 이런 초석이 출토된 것은 지난 97년과 99년에 이어 벌써 세 번째다.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일반주거지에서 사용할 수 없는 기와나 전돌, 흙으로 만든 관 같은 것들이 여러 가지 유물들로 봤을 때 특수한 건물지, 적어도
왕궁 내지는 관청 정도에서나 쓸 수 있는 성격의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었다. 이런 유물들로 봤을 때 역시 풍납토성이 초기백제의 왕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신희권 학예연구사)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시조인 온조왕대에 이미, 한강 이남은 물론 북쪽
예성강까지 세력을 미쳤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서울시내에서 잇따라 출토되고 있는 백제유물들은 한강이북에까지 세력을 미쳤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백제의 건국은 고구려로부터 출발한다.
어느날, 고구려의 왕 주몽에게 한 남자아이가 찾아온다. 그는 자신을 주몽이
부여시절에 낳은 아들, 유리라고 소개하더니 주머니에서 반 토막난 비수를 꺼내 보인다.
“아버님의 유품을 이제야 찾았습니다.”
그러자 주몽도 품에서 반토막이 난 비수를 꺼내어 그 둘을 맞추어본다. 그 둘은 한 칼이 되었다.
“너야말로
내 아들이 틀림없구나!”
주몽은 유리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고, 태자로 책봉한다. 그러나, 주몽에게는 고구려에서 낳은 두 아들이
있었다. 형의 이름은 비류, 동생의 이름은 온조 였다. 유리가 찾아오자 왕자로서 둘의 입장은 곤란해졌다.
“형님, 남쪽으로
내려갑시다.” “그래. 우리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새 나라를 세우자.“
부여에서 태어난 유리와 고구려에서 태어난 비류와
온조, 왕권을 놓고 다툴 법도 했지만, 왕자들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이나 다툼이 없었다. 이것 역시 한국신화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이야기다
“한국 신화에서 가족 내의 다툼은 없다. 유리가 태자가 되는 것을 동생이 되는 비류와 온조는 우리가 왕이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다만 비류와 온조는, 태자가 왔으니까 우리는 떠나야 한다, 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을 따르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떠난다.”(신화학자 이경덕)
신하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온 비류와 온조는 마침내 지금의 서울 북한산인 북아악의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갔다. 사방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때까지 한뜻이었던 형제의 마음이 이때부터 서로 달라진다. 의 설명이다.
“비류는
오늘날 인천, 미추홀로 가고, 동생 온조는 오늘날 서울 중심으로 볼 수 있는 위례성으로 오게 되는데 그때 온조는 십 여명의 신하를 인솔해서
마한지역으로 내려왔다. 하남 위례성은 백제의 첫 번째 도읍터로, 경기 일부와 서울을 중심으로 한 한강을 끼고 발전할 가능성을 가졌기 때문에
거기에 터전을 닦았다.”(성신여대 사학과 명예교수 이현희 교수)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가고 싶었던 비류는 미추홀에 도읍을 정했고,
온조는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십제라 했다. 그러나, 지금의 인천, 미추홀은 땅이 습한데다 물이 짜서
백성들이 살기가 힘들었다. 고생이 막심했던 비류는 동생의 형편을 살피기 위해 위례성으로 다니러 왔는데, 그곳은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비류는 자기뿐 아니라 백성까지 고생시키게 된 것은 부끄럽게 여겼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병이 든다. 그는 숨을 거두면서 신하와 백성들에게 동생의
나라인 십제로 가라는 유언을 남긴다.
“내가 죽으면 백성들을 이끌고 십제로 가시오. ”
미추홀의 백성들이 위례성으로
모여들었고, 온조는 국호를 십제에서 백제로 바꾸었다. 그런데 백제가 자리 잡은 지역의 남쪽, 즉, 지금의 충청도와 전라도지역에는 쉰 다섯 개의
소국을 거느린 마한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상당히 선진적인 정치집단을 이루고 있었는데, 백제 역시 처음에는 마한에 공물을
바쳤던 소국에 불과했다. 그러나 온조는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한 군사력을 앞세워 마한을 쓰러뜨리고 세력을 점차 넓혀나가게 된다.
“백제가 건국하기 이전에 한강을 중심으로 경기 충청 일부에는 부족들이 있었고 그러한 부족들을 아우르게 됨으로써 하나의 국가 단위로
나간 것이고이것이 백제건국의 전단계라고 볼 수 있다. 온조대에 벌써 고구려의 정치, 사회,제도를 본받았기 때문에 상당히 안정됐던 것이고 다른
외래민족이 침범하거나 위협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백제건국의 특성을 살려나갔다.” (이현희 교수)
그리하여 기원전 6년인 온조 13년
백제의 영역은 북으로 예성강, 남으로 공주, 동으로 춘천, 서쪽으로는 서해에 이르는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2세기 중엽, 백제는 중국
세력이 감히 제어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강성한 나라가 되었다.
백제는 660년에, 고구려는 668년에 차례대로 멸망한다. 이
두 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삼국 가운데 가장 뒤늦게 국가체제를 갖춘 신라였다. 그런데, 신라의 건국신화는 고구려와 백제와는 다른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신라를 건국한 것은 박혁거세. 그러나, 그는 경주평야에 자리잡고 있던 6부족의 우두머리들에 의해 추대를 받은 형태로 왕이 된다. 또
왕위에 오른 후에도 고구려, 백제와는 달리 세습정치가 아니라 박,석,김 이라는 세 가지 씨족이 번갈아 왕위에 오른다.
오늘날
경상도땅에 해당하는 진한에 여섯 개 마을이 있었다. 이 여섯 마을의 촌장들이 바로 후세에 전하는 이, 정, 손, 최, 배, 설.. 이라는 성의
조상들이다. 여섯 촌장들은 모여서 정치에 관한 의견도 나누고,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여러 가지 모임을 갖기도 했다.
“부족장으로서
한 부족을 다스려나갔는데 독자성이 있어서 행정, 법률, 식사까지 처리해주는 복지시설 같은 것들을 담당해감으로써 고구려나 백제에서 볼 수 없는
민원민생을 해결해주는 역할을 했다.”(이현희교수)
여섯 촌장들은 자신들을 이끌고, 촌민들이 떠받들 수 있는 왕과 같은 존재가 있기를
소망했다.
“우리 촌민들이 우러러 받들 수 있는 왕이 한 분 계셨으면 좋겠소“ “그러게 말이오”
그러던,
어느날, 숲에서 신비로운 빛이 흘러나오고, 눈부시게 하얀 말이 연신 절을 하는 것이었다.
여섯 촌장이 가까이 가보니 거기에는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알이 하나 있었다. 말은 사람을 보더니 하늘로 올라가버렸고, 알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알에서 나온 것은 아름다운
사내아이였다. 촌장들은 그 푸르스름한 신비로운 빛은 천상의 계시며 흰 말은 하늘의 사자(使者)라고 여겨, 아이를 하늘이 낸 사람이라 생각하고
정성을 다해 길렀고, 열세살이 되던 해 왕으로 세웠다. 그가 바로 박혁거세다. 스스로에게 붙인 이름이었다.
“알에서 깨어 나온
다음에 이 알을 여기서 뭐라고 부르느냐. 표주박처럼 생기지 않았습니까? 나는 박이라고 하겠다. 해서, 박씨가 된다. 혁거세는 밝게 빛나게
세상을 다스리겠다. 라는 뜻이다.”(신화학자 이경덕)
박혁거세의 나라는 이름을 서라벌이라고 불렀는데, 어떤 사료에서는 사로국이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데, 혁거세의 죽음은 탄생만큼이나 신화적이다. 그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천마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 천신을 뵙고
상의를 한 다음 땅으로 내려와 정사를 돌보았는데, 혁거세가 총애하는 궁녀가 하늘구경을 하고 싶다면서 매일 조르는 것이었다.
“저도
하늘 구경 한번 시켜주세요. 소원이예요.”
그러나 인간은 천상의 세계에 발을 들일 수 없는 법. 아무리 총애하는 궁녀라도 들어줄 수
없는 소원이었다. 궁녀는 혁거세 몰래 변신을 한다. 조그만 곤충으로 변해 천마 뒤에 숨은 것이다. 천신이 모를리 없다.천세의 신성함을
어지럽힌 혁거세에게 중한 벌을 내리고 만다. 몸은 땅으로 내려보내고 영혼은 하늘에 남겨둔 것이다.
“너의 몸은 땅으로 내려보내고,
영혼은 여기 남으라!“
천신의 불호령이 떨어지자마자 혁거세의 몸은 땅으로 떨어진다.
“몸이 다섯으로 나누어져서
땅으로 떨어진다. 지금 경주에 가면 오릉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다섯 개의 몸이 떨어진 곳을 수습을 해서 묻으려고 했다. 함께 묻으려 하는데
그때마다 뱀이 나타나서 어쩔 수 없이 머리, 팔 다리의 오체를 각각 묻었다.”(신화학자 이경덕)
혁거세가 죽은 후, 그의 맏아들
남해차차웅이 왕위를 잇는다. 장자 상속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신라에서는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었다. 4대 왕부터는 석탈해로 시작하여 석씨
성을 가진 왕들이 통치를 했고, 또, 13대 왕부터는 김씨 성이 왕권을 이어받게 된다. 그들은 또 선대왕의 유언이 아니라 모두 화백제도에서
만장일치로 뽑혀 왕이 된 것이었는데, 화백제도는 6촌 촌장의 모임이 발전한 것으로 씨족들의 모임이었다. 여기에서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결정을
보지 못하는 것으로, 다른 고대왕권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민주적인 모습이었다.
“혁거세가 다른나라와 같이 아들, 아들로 연결되는
역대 왕이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박,석,김이라고 하는 3성이 병렬로 교대로 왕이 됐다. 그것이 신라가 갖는 특징이다. 이러한 사회적인 배경와
관습과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혁거세의 아들이 아닌 석탈해가 되고 김알지가 왕이 된다. 백제, 고구려와 비교가 되지 않는 신라만의 독특한
제도였다.”(이현희교수)
신라라는 나라 이름이 정해진 것은 22대인 지증왕 때의 일이다. 이렇게 왕권의 기반을 닦은 삼국, 즉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는 철기문화와 기병전을 바탕으로 강력한 지배체제를 마련하면서 때로는 대립과 전쟁으로, 때로는 교류와 협력으로 서로를
견제하는 세월을 맞게 된다. 그 기간은 먼 훗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까지 장장 7백여년이었다.
(KBS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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