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알지·김수로는 북방기마민족 후예

대릉원 고분군은 민족기원 증명해 줄 보물

벨기에의 작가 마테를링크(1862∼1949)가 쓴 동화극 『파랑새』는 가난한 나무꾼의 아이들 치르치르와 미치르 남매가 크리스마스 전야에 꾼 꿈을 극으로 엮어서 인간의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를 암시한 것이다.

남매는 옆집 마법사 할머니로부터 ‘병든 딸을 위해 파랑새를 찾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개·고양이·빛·물·빵·설탕 등의 님프(요정)를 데리고 추억의 나라와 미래의 나라 등을 방문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돌아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꿈을 깨고 보니 자기네가 기르고 있는 비둘기가 파랗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데 그 새가 파랑새임을 깨닫는 순간, 날아가 버린다.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파랑새처럼, 행복은 그 존재를 인식하기도 어렵지만 간직하기도 그에 못지 않게 어려운 것임을 알려준다.
『파랑새』는 1908년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출로 모스크바예술극장에서 상연되어 성공함으로써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으며 이어 그 작가인 마테를링크가 1911년 노벨 문학상을 받음으로써 그 명성을 더욱 드높였다. 그후 ‘파랑새’라는 말은 희망의 대명사로 지금도 ‘파랑새=희망’이란 등식이 성립되어있다.

대부분 한국 사람들은 외국의 유산에 대해서는 흥미를 느끼고 잘 이해하지만 우리나라 유산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식하다. 어떤 사람은 우리 것 즉 우리나라 유산 중에서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이 정말로 있느냐고 반문한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바로 파랑새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다.

   
 
경주 황남동 대릉원 고분군.

우리 유산 중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 바로 경주 대릉원의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이 있는 대형 고분군이다. 이 고분군은 신라의 마립간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일명 적석목곽분이라고도 하는데 이 고분군이야말로 북방의 기마민족이 유라시아 대륙의 극동지역 맨 끝에 자리한 신라에 도착했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신라와 가야의 시조는 천손의 자손〉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건국되어 935년에 멸망할 때까지 무려 1000년을 이어 온 한국 역사상 최장수의 왕국이다. 따라서 경주 일원에는 신라인들이 남긴 무수한 고분을 비롯하여 유적들이 산재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시내 중심부에 밀집되어 있는 원형 고분들이다.

이 원형 고분군은 기원전 3∼4세기 스키타이를 비롯하여 흉노 등 북방기마민족들이 사용한 스키타이-알타이 쿠르간과 동일한 구조와 형태를 갖고 있으므로 신라가 북방기마민족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중요한 증거로 제시되었다.
한데 신라가 북방기마민족과 연계된다는 설명을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북방기마민족이라면 일반적으로 현 몽골지방에서 강성했던 흉노 등 유목민을 의미하는데 신라를 북방기마민족의 후예라니 가당치 않다는 것이다. 이런 반발에는 한국인이 문화민족인데 오랑캐와 같이 말만 타고 다닌 유목민이라니 말도 안 된다는 거부감이 포함되어있다.  
그러나 신라가 북방기마민족의 후예라는 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증명된다. 여기에서는 신라 김씨와 가야의 시조가 북방기마민족의 후예임을 알려주는 자료만 설명한다.

   
 
적석목곽분 구조도(천마총). 지상이나 지하에 시신과 부장품을 넣은 목곽을 설치하고 그 위에 냇돌을 쌓은 다음 흙으로 봉분을 만들었다. 도굴이 어려워 신라의 부장품이 많이 발견된 이유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김씨의 시조(始祖)인 김알지(金閼智)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삼국유사』〈김알지〉 부분은 다음과 같다.

‘영평(永平) 3년 경신(혹은 중원(中元) 6년이라고 하나 틀린 것이며, 중원은 2년에 끝났음) 8월 4일 호공(瓠公)이 밤에 월성(月城) 서리(西里)를 지나다 큰 빛이 시림(始林 : 구림(鳩林)이라고도 함) 가운데서 빛나는 것을 보았다. 자색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드리워지고, 구름 가운데 황금 궤가 있어 나뭇가지에 걸려 궤에서 빛이 나오고 있었으며, 또 나무 밑에서는 흰 닭이 울고 있었으므로 왕에게 고하였다. 왕이 그 숲으로 행차하여 궤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즉시 일어났다. 마치 혁거세의 고사(혁거세를 알지라고 했음)와 같았기 때문에 그 말로 인하여 알지(閼智)라고 이름 붙였다. 알지란 방언으로 어린아이란 뜻이다. 왕이 수레에 싣고 대궐로 돌아오는데,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라와 뛰놀고 춤추었다.

왕이 길일을 가려서 태자로 책봉했으나 뒤에 파사왕(破娑王)에게 사양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금궤에서 나왔다하여 이에 성을 김씨(金氏)로 하였다.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이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가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가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가 구도(俱道 또는 仇刀라고 함)를 낳고, 구도가 미추(味鄒)를 낳았는데, 미추가 왕위에 오르니 신라의 김씨는 알지로부터 시작되었다.’

경주국립박물관에 보관중인 문무왕(文武王)의 능비문(陵碑文)을 보면 문무왕이 북방기마민족의 후예임을 보다 명백하게 알 수 있다. 「문무대왕릉비」라고 불리는 이 비석은 1796년 정조 20년 경주에서 밭을 갈던 농부에 의해서 발견되었고 당시 경주부윤이던 홍양호(洪良浩)가 그 비문을 탁본해 당시 지식인들에게 공개했다.

이 비의 건립연대는 대체로 문무왕이 사망한 서기 681년 또는 그 이듬해로 추정한다. 비문의 내용은 대체로 앞면에는 신라 예찬, 신라김씨의 내력,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치적, 백제 평정 등이 적혀있고 뒷면에는 문무왕의 유언, 장례, 비명 등이 적혀 있다.

   
 
문무대왕 능비문. 글자가 새겨져 있는 부분은 사라지고 하부만 남아있지만 200년 전의 탁본이 남아 해득이 가능했다(『금문의 비밀』).

그러나 이 비문은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일제 강점기에는 빨래대로 사용되다가 두 조각이 되었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글자가 새겨진 상부 쪽은 사라지고 글자가 새겨지지 않은 하부 쪽만 현재 경주박물관에 보관중인데 다행하게도 탁본이 지금까지 전해져 온 것이다.

이 비문에 적힌 부분 중 주목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 선조들의 신령스러운 영원(靈源, 김대성은 '신령스런 근원'으로 해석하기보다 투후가 된 김일제가 받은 땅이라고 해석)은 먼 곳으로부터 계승되어온 화관지후(火官之后)니 그 바탕을 창성하게 하여 높은 짜임이 융성하였다. 종(宗)과 지(枝)의 이어짐이 비로소 생겨 영이한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낼 아들로 태어났다. 7대를 전하니(거기서 출자(出自))한바다.
15대조 성한왕(星漢王, 김알지)은 하늘에서 바탕을 내렸고, 선악(仙岳)으로부터 신령이 비로소 탄생하여 금궁전(金宮殿)에 어림하고 옥란간(玉欄干)을 대하여 처음으로 조상의 복이 상서로운 수풀처럼 많아 석유산(石紐山)을 보는 것 같았다.’

이 기록은 신라 왕이 된 신라김씨의 선조인 김알지가 어떻게 신라로 들어왔는지를 알려준다.

기원전 122년 한무제(漢武帝) 때에 곽거병은 감숙(甘肅)지방에 있던 흉노를 공격했다. 흉노의 계속되는 패전에 당시의 이치선우는 그 책임을 물어 휘하의 혼야왕과 휴도왕을 죽이려 했다. 이에 두 왕은 이치선우의 문책이 두려워 한(漢)나라에 항복하려 했는데, 도중에 휴도왕이 항복을 망설였기 때문에 혼야왕이 휴도왕을 죽였다. 휴도왕의 큰아들 일(日, 일제)과 동생 윤(倫)이 어머니와 함께 포로가 되어 한나라에 잡혀갔는데 두 왕자가 무제에게 발탁되어 제천금인(祭天金人 : 흉노가 하늘에 제사 지내는 황금으로 된 옹건(神像))을 뜻하는 김(金)씨 성을 하사 받았다.

『한서』「흉노전」의 주석(註釋)을 보면 제천금인은 원래 흉노의 지성소(至聖所)인 운양현 감천산 아래에 있었는데 기원전 215년, 지성소를 진시황제에게 점령당하자 그 서북쪽에 자리잡은 휴도왕의 우측 땅으로 옮겨 휴도왕이 '제천금인상'을 모셨다고 적었다. 그러므로 무제가 휴도왕이 모셨던 '제천금인'을 상기시키는 김씨 성을 휴도왕의 아들인 김일제에게 준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런데 김일제의 후손인 김알지의 경우 원래 김은 금(Gold)을 뜻하는데 이름인 알지(閼智)도 몽골-투르크어계에서 금을 의미한다. 즉 알타이 언어의 알트, 알튼, 알타이가 아르치, 알지로 변한 것으로 김알지는 금 금(Gold Gold)을 뜻한다. 김씨왕계가 수도를 금성(金城)이라고 한 것도 북방기마민족이라면 연상되는 제천금인과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주채혁 박사는 한 발 더 나아가 아시아 북방민족들의 경우에 징기스칸의 혈족을 일컫는 Altan(황금) Urug(씨족)처럼 '김씨(金氏)'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임금씨족 곧 천손족(天孫族)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라고 설명했다. 후금(後金)인 만주제국의 황족을 애신(愛新, 황금) 각라(覺羅, 겨레)라 부른 것과도 다름아니라는 뜻이다.

그 후 일제는 무제의 경호를 맡을 만큼 신임을 받던 중 무제의 침실에 숨어들어 온 자객과 현장에서 격투를 벌려 체포함으로써 더욱 더 무제의 신임을 받았다. 한무제는 자신의 딸을 김일제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려 했으나 김일제는 이를 사양했다. 한무제는 임종시에 어린 소제(昭帝)를 보필하라는 유촉을 그에게 내렸다. 『한서』에 그 당시의 일이 적혀 있다.

무제가 죽기 전 김일제를 포로로 했던 곽거병의 동생 곽광과 김일제를 불렀다. 곽광이 물었다.

“만약 폐하께서 세상을 버리시게 된다면 누가 후사가 되겠습니까?”
“그대가 앞서 받은 그림의 뜻을 모른단 말인가. 막내아들을 세우고 그대는 주공(周公)의 일을 하라”

이에 곽광은 자신이 김일제 보다 못하다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양했다. 김일제 또한 자신이 외국인이며 곽광보다 못하다고 말하자 무제는 곽광을 대사마대장군, 김일제를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하고 어린 황제를 보필하라는 유조(遺詔)를 남겼으며 다시 김일제를 제후국의 왕인 투후로 봉했다.

   
 
신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 설화를 그린 그림.

김일제의 후손들은 대대로 후(侯, 투후)를 계승했다. 김일제는 사망한 후 무제의 능인 무릉(茂陵)의 공신으로 배장(陪葬)되었는데 그의 묘는 현재 서안에서 서쪽으로 40킬로미터 떨어진 섬서성 홍평현 남위향 도상촌(道常村)에 있다.
그러나 김일제의 후손은 왕망이 전한(前漢)을 멸하고 신(新, 8∼23)을 건설하는 와중에 대격변을 겪는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김일제의 5대손인 성한왕(星漢王)이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되며 김일제의 동생인 윤(倫)의 5대손 탕(湯)이 가야로 들어와 김씨 시조인 김수로가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휴도국의 왕자인 김일제와 김윤의 후손이 신라와 가야로 들어오게 된 배경은 신(新)을 건설한 왕망(王莽)이 김일제의 증손자 당(當)의 이모부였기 때문이다.

왕망이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신을 건설할 때 북방기마민족의 천손임을 자부하는 김씨 일가가 한나라를 멸망시키는데 큰 기여를 한 것은 『한서』〈왕망전〉에도 나와있다. 그런데 한나라를 멸망시킨 왕망이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혁신적인 개혁조치를 추진하다가 단 15년 만에 후한 광무제 유수(光武帝 劉秀)에게 멸망한다(중국은 왕망이 한나라를 멸망시킨 것을 인정하지 않고 광무제가 한나라를 계승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후한을 세운 광무제는 한나라를 멸망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김일제의 후손들을 철저하게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원래 북방기마민족인 김일제의 후손들 대부분은 자신의 원래 본거지인 휴도국(休屠國)으로 도주하여 성을 왕(王)씨로 바꾸고 살았다.

그런데 광무제에게 쫓긴 김일제의 후손 모두 휴도국으로 간 것이 아니다. 그 중 한 갈래가 가야로 들어와 가야의 시조인 김수로가 되고 신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는 신라로 들어갔는데 추후 그의 후손인 미추가 신라왕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김씨의 내력을 적은 문무왕(文武王)의 능비(陵碑)는 신라김씨가 북방기마민족 즉 천손의 자손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새긴 것으로 추정한다. 한반도의 서북, 김해, 제주지방에서 왕망 시대의 화폐 오수전(五銖錢)이 많이 출토되는 것도 이들이 국외로 도피할 때 가져온 것이라는 해석이다.

물론 문무왕 비문에 등장하는 ‘투후의 후손이다’라는 설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많은 학자들이 모화(慕華) 사상에 젖은 문무왕이 자신의 뿌리를 중국에 갖다 댄 것이라고 이를 무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무왕은 모화사상에 젖은 사람이 아니라 대당(大唐) 결전을 통해서 전성기의 세계제국 당을 한반도에서 물리친 왕이다. 더구나 조갑제는 그가 정말로 모화사상에 젖어 조상의 계보를 조작하려면 왜 하필 한족(漢族)이 싫어하는, 더구나 한을 멸망시키면서 신(新)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지만 종국에는 후한 광무제에게 철저하게 패배하면서 배척 당하는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지칭했는가 하고 지적했다.

   
 
중국 섬서성 홍평현 남위향 도상촌 무제의 무릉 옆에 있는 김일제의 릉과 비. 신라 김씨의 선조로 알려진 김일제는 흉노 휴도왕의 후손으로 무제로부터 직접 ‘김씨’를 사성받았다. 묘지는 1984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사진 김대성).

『삼국유사』에 따르면 궤짝 안에 있던 김알지가 발견된 곳은 시림(始林)으로 다시 말하면 나무가 많은 곳이다. 북방지역에서는 흰색의 자작나무(白樺樹 : 백화수)를 생명(生命)을 의미하는 신수(神樹)로 숭상하는데 일본사람들이 신라를 시라기(白木)라고 부른 것도 이와 같은 뜻이 함축되어 있다고 추정한다.

『삼국유사』에 석탈해(昔脫解)가 김알지를 안고 대궐로 가는 길에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라와 뛰놀고 춤추었다’고 쓰여 있는 것도 북방과의 연계를 의미한다. 북방 기마민족들은 새가 인간과 절대자를 연결하는 매개자(媒介者)라고 믿었고 조장(鳥葬)을 치르는 풍속도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그들은 새가 죽은 사람을 하늘나라로 운반해 준다고 믿었다.

〈북방기마민족의 상징 적석목곽분〉

신라김씨의 선조가 북방기마민족의 후예라는 것은 여러 사료에 의해 증명되지만 이를 보다 공고히 해주는 것은 경주 황남동 대릉원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다.

적석목곽분이란 땅을 파고 안에 나무로 통나무집을 만들고(지하로 6∼7미터의 땅을 파고 그 안에 대형 목곽을 설치한 쿠르간도 있음) 시체와 부장품들을 안치한 후에 위에는 상당히 많은 돌로 둘레를 쌓고(護石) 흙으로 커다란 봉분을 만드는 것을 말하며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중국, 일본에는 없는 무덤이다.

원래 북방 초원(스텝) 지역에서는 유력자가 죽으면 그가 생전에 살던 통나무집을 돌과 흙으로 그대로 덮어버린다. 그래서 스텝지역의 적석목곽분을 파보면 난방시설의 흔적도 남아 있고 심지어 창문도 발견된다. 신라 김(金)씨들은 그런 옛 전통에 따라 지상에 시신을 넣을 집을 일부러 짓고 그 위에다 냇돌을 쌓은 다음 흙으로 반구형(半球形) 봉분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적석목곽분은 세월이 지나면 목곽 부분이 썩어 주저앉기 때문에 적석 중앙 부분이 함몰되어 낙타 등처럼 된다. 봉토는 거의 대부분 원형인데, 적석시설이 상당히 큰 규모이고 그것을 둘러싼 봉토 또한 대규모여서 신라의 고분이 고구려나 백제지역의 고분에 비해 상당히 대형화한 요인이다. 원래 적석목곽분은 평지에 조성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경주, 창녕, 동래 등지의 경우 구릉지에 조성된 것도 있으며 대체로 적석목곽분은 무덤의 구조상 도굴하기가 비교적 어려워 원형이 보존되는 경우가 많다.

적석목곽분은 4∼6세기 6대에 걸친 마립간 시대(내물-실성-눌지-자비-소비-지증마립간, 간이라는 칭호는 북방기마민족들이 주로 사용)에만 나타나는데 이를 만든 신라김(金)씨 왕족의 뿌리가 대초원지대의 기마민족이라는 기록을 증빙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적석목곽분이 아시아 최동단 중에서도 가장 남쪽인 신라 지역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세계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일반적으로 북방기마민족이라면 서쪽으로는 스키타이지역으로부터 동쪽으로는 몽골지역까지 초원을 근거로 하여 농경민과 수없이 혈투를 벌인 것으로 추정하는데 신라와 같이 전형적인 농경문화 지역에서 전형적인 북방기마민족의 무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적석목곽분의 원형 통나무집. 북방지역에서 흰자작나무로 지은 통나무집은 죽은 사람의 무덤을 만드는 기본구조이다. 이런 통나무집에 관(棺)과 부장품을 넣은 다음 그 위로 자갈돌을 쌓아 덮는 것이 적석목곽분이다(김정배 사진).

여러 문헌의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들을 종합해 보면 신라인의 구성은 여러 민족이 여러 시기에 걸쳐 혼합되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한-신라 지역에는 선사시대부터 살면서 수많은 고인돌을 남겨 놓은 토착 농경인들, 기원전 3세기 중에 진(秦)나라의 학정을 피해 이민해 온 사람들, 기원전 2세기에 이주해 온 고조선의 유민들, 고구려에게 멸망당한 낙랑(樂浪)에서 내려온 사람들 등이다.

그런데 4세기 이후 한반도 남부의 사정은 급변하고 있다. 삼한(三韓)은 사라지고 백제와 신라, 가야연맹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신라는 356년 내물왕 즉위 이후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등 고대 국가의 모습을 뚜렷이 보이고 있다. 내물왕 26년(381) 신라는 북중국의 유목민족 국가 전진(前秦)에 사신을 보낸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전진의 황제 부견(符堅)과 신라 사신 위두(衛頭) 간의 대화가 기록돼 있다.

‘부견이 위두에게 묻기를 “그대의 말에 해동(海東:신라)의 형편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하니 무엇을 말함이냐”고 하니 위두가 답하기를 “이는 마치 중국의 시대변혁·명호개역과 같은 것이니 지금이 어찌 예와 같을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이 기록에 대해 지금까지는 신라가 내물왕 시기에 들어 나라가 크게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답변이라고 풀이해 왔지만 일반적으로 시대변혁·명호 개역은 단순히 나라의 체제가 정비된 수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큰 격변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이전까지의 석(昔)씨 임금 시대가 끝나고 외부세력이 정권을 장악해 모든 면에서 과거와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됐음을 의미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내물왕 이후 석(昔)씨는 신라 역사의 주류에서 사라진다. 왕은 물론 왕비나, 재상, 학자, 장군 가운데서 석씨는 찾아볼 수 없다.

신라 김씨보다 역사가 오래된 석씨지만 현대 한국사회에서 석씨는 대단한 희성인데 이는 내물왕 집권기에 석(昔)씨가 철저히 제거됐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이 경주의 적석목곽분 출현을 마립간시대에 북방기마민족이 신라지역에 들어와 지배계급이 됐음을 입증하는 가장 결정적 증거로 제시하고 있음은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이종호 / 과학저술가>

(국정브리핑 2004-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