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청산 당당히 요구하라

광복 59주년을 맞는 우리의 소회는 씁쓸하다. 안으로는 역사 바로세우기와 친일 규명의 기치가 높이 올려지고 있지만, 정작 가해자 일본의 시대착오적 역사인식은 별로 달라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과거를 묻지 않겠다는 우리 정부의 ‘면죄부’에라도 고무된 것일까. 이미 참배한 각료들이야 그렇다 치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내년에도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강행하겠다고 당당히 밝힌 것을 어떻게 봐야 할지 실로 어이없다. 그것은 일제 침략과 강점의 고통을 여전히 기억하는 한국인의 정서나 중일 축구전에서도 확인된 중국의 반일감정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식의 ‘마이 웨이’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는 또 어떤가. 이번 일로 여당 의원들의 인식이 다소 변하고 있다고 들린다. 하지만 63%가 중국을 ‘가장 중점을 둬야 할 외교통상국’으로 응답한 반면 26%만이 미국을 꼽았던 여당 의원들의 의식이 크게 변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주 교역국일 뿐 아니라 북핵 문제를 푸는 등 한반도 긴장 완화에도 중국의 도움이 필수적이라서 역사 문제로 사이가 나빠지게 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어쨌든 국민은 지금 집권세력이 민족 정체성을 훼손하는 역사 문제조차 중·일의 눈치를 본다고 믿는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한일 정상회담에서 “내 임기 중엔 한일 과거사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것이나, 열린우리당의 천정배 원내대표가 방일시 “친일 규명은 국내 문제로 한일 우호엔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한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여당 의원들이 북한 인권법이나 이라크 파병엔 ‘반미 성명’까지 즉각 내면서 일본의 망동과 중국 역사 가로채기엔 유독 ‘조용한 외교’를 말하는 이유도 묻는다.

여권은 한국과 일본, 중국이 EU와 같은 공동체로 가기 위해서라도 역사 문제엔 차분히 ‘학술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논리도 편다. 하기야 자유무역을 하고 단일 화폐를 사용하며, 3국의 언어가 공용어가 되어서 이들 나라 청소년들이 스스럼없이 섞여 사는 아시아 공동체, 그 비전 자체가 헛된 꿈일 수는 없다. 그것은 시간이 걸릴지언정 세계화와 동북아 블록화 흐름 속에 실현할 수도 있는 꿈이다. 하지만 올바른 역사관에 의한 교육, 그것을 통해 2세 국민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시민으로 길러내는 공동의 노력 없다면 그런 ‘동북아 드라마’는 한낱 환상일 뿐이다.

‘한 지붕 아래의 유럽’ 은 저 유명한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의 진정한 역사 사죄에도 힘입은 바 크지 않았던가.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 무명용사묘지를 찾은 브란트는 털썩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수행원들도 울었다. 그리고 이 역사적인 사죄와 화해의 감동적인 장면은 나치 독일 만행의 피해자들까지 그의 사죄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고이즈미 총리가 ‘브란트 모델’을 받아들여 이 나라 항일선열 영전에서, 난징과 같은 학살 장소에서 그렇게 무릎을 꿇고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사죄한다면 아시아의 역사는 새로운 장을 열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상상 속의 그림일 뿐이다.

전후의 독일이 얼마나 철저하게 반성하고 2세 역사 교육에 힘썼는가는 그들의 교과서를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그러나 ‘통석의 념’이니 뭐니 하면서 알쏭달쏭한 수사로 사과해온 일본, 역사 교과서 하나 제대로 반성의 토대 위에서 만들지 못하는 일본에 무엇을 바라랴. 뉘우치는 내용이 결여된 교과서로 교육하고 총리가 전범(戰犯)의 위패가 있는 신사에 참배하는 일본은 평화주의 아닌 침략주의를 은연중에 2세에 가르치고 있는 셈이 아닌가.

친일진상규명법을 통해 민족정기를 바로잡겠다면서도 일본에 과거사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것은 그래서 비판의 도마에 오른다. 가해자 일본엔 입다물고 ‘국내용’으로 친일 협력만 파헤치고 응징한다면 그것은 이중잣대의 역사 바로세우기요 굴욕외교란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한 처신도 마찬가지다.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자랑하며 군사대국으로 치닫는 일본이나 역시 군사력 강화 의지를 다지는 중국은 경제와 군사력이 커지면서 더 노골적인 역사왜곡을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패권주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그래도 과거를 묻지 않는 선의(善意)와 조용한 외교로만 일관할 것인가. 그들은 우리를 더욱 얕잡아 볼 텐데도 말이다. 노 정권은 이제부터라도 과거사 반성과 역사 왜곡 시정을 당당한 목소리로 요구해야 한다.

(세계일보 / 유재철 주필 2004-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