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한국사 ‘시정 아닌 삭제’ 의도 촉각

중, 원상복구는 안밝혀
고구려사 왜곡 새국면으로

중국이 5일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 역사를 통째로 삭제함으로써 한-중 역사논쟁이 새 국면에 들어섰다.

중국의 이번 조처를 한국의 요구를 일부 수용한 고육책으로 보느냐, 아니면 한국의 요구를 전면 거부한 강경책으로 보느냐에 따라 향후 한-중 역사논쟁의 방향과 강도가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일단 실망과 유감을 표시했다.

정부는 지난 4월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서기 1세기 한반도를 구성한 정권 가운데 고구려 부분을 제외한 사실을 확인하고, 강경한 어조로 중국 정부에 원상복구를 요구해 왔다. 지난달 13일 김하중 주중 대사가 중국 외교부를 방문해 심각한 우려를 전달했고, 14일에는 최영진 외교통상부 차관이 리빈 주한 중국대사를 외교부로 불러 시정을 촉구했다. 이 자리에서 최 차관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은 패권주의의 발로가 아니냐고 따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가 이처럼 강경한 태도를 보인 것은 중국 중앙정부의 개입 없이는 현재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구려사에 대한 광범위한 역사왜곡이 이뤄지기 힘들다는 판단 때문이다. 지난 2월 왕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방한해 이 문제를 학술 차원에서 다루자고 합의했음에도 <인민일보>와 <신화통신> 등 중국의 관영 매체들이 일제히 고구려를 한반도를 구성한 정권 대신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보도한 것은 그 한 예다.

중국 정부는 이에 대해 시간을 달라며 즉답을 피해왔다. 그러면서 내부적으론 한국의 강력한 문제제기에 당혹해하며 대책 마련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 지난 2일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 역사를 삭제하기로 결정하고, 며칠 안에 관련 부분을 고칠 예정이라고 통보해 왔다.

정부는 이에 4일 서울과 베이징의 외교경로를 통해 수정이 아닌 삭제 방침에 유감을 표시했으나, 중국 정부는 5일 낮 12시께 예고한 대로 한국의 고대사 부분을 통째로 삭제했다. 중국 정부는 이번 결정에 대해 “한국 국민들의 관심을 중시해 나름대로 고심한 끝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을 뿐, 더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정부 관계자는 “중국이 한-중 관계를 고려해 내린 결정으로 보이나 우리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이처럼 중국의 이번 조처에 실망감을 표시하는 것은 홈페이지에서의 과거사 삭제가 고구려사 왜곡을 즉각 중단하겠다는 중국 정부의 명확한 의지 표명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중국 지방당국과 대학교재 등 출판물을 통해 이뤄지고 있는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중국 정부의 응답이 없다는 점도 이런 실망감을 부추기고 있다.

정부는 이에 따라 중국 정부에 고구려사 왜곡 중단을 요구하는 기존 태도를 고수하며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다는 방침이다. 박준우 외교통상부 아태국장이 이날 오후 베이징으로 건너가 7일까지 현지에서 왕 부부장 등과 만나기로 한 것은 이런 노력의 일환이다.

유강문 기자

중국, 동북공정 계속 추진 뜻 보여
고구려사 논쟁 ‘학술쟁점’전환해 본래의도 관철 노릴 듯

중국 외교부가 한국 현대사 이전 역사를 모두 삭제한 5일의 홈페이지 수정 조처에 대해 중국 외교가의 한 관계자는 “국가 대 국가의 관계에서 상대국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여 ‘원상 복귀’를 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는 한국의 요구를 깡그리 무시하기도 어려워서 나온 ‘묘안’ 또는 ‘궁여지책’”이라고 평했다.

중국 외교부는 홈페이지의 시정으로 고구려를 둘러싼 두 나라 사이의 ‘정치외교적 문제’는 해결됐으므로 이제 이 문제를 학자들에게 맡기자는 태도를 다시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배후에는 중국 국무원 산하기관인 중국사회과학원의 변경역사지리연구중심이 주축이 돼 진행해온 ‘동북공정’이라는 국책 역사지리 연구사업이 존재한다. 중국 정부는 한국 쪽에 ‘동북공정’이 학술연구라고 주장해왔다. 여기서 중국 정부의 논리가 분명해진다. 고구려사 논쟁을 ‘학술 차원의 문제’로 돌리자고 주장한 뒤, 동북지방 영토문제와 관련해 중국에 유리한 자료와 논리를 쌓아가기 위한 작업을 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동북공정’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의도다. 동북공정 사무처는 내년 초 ‘고구려’ 관련 자료집과 연구논문집을 발행할 예정이며,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 한국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이 일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이 때문에 ‘학술연구로 돌리자’는 식의 미봉책에 쉬 합의하는 건 중국의 논리에 말려드는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중국이 국책 연구기관을 통해 이 작업을 계속 진행하고 있는 이상, 한·중 두 나라가 정부 차원에서 ‘동북아시아 역사문제 공동위원회’(가칭)를 구성해 양국의 예민한 역사문제에 관해 긴밀히 협의하고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동북공정뿐 아니라 영토문제에 대해 국가주의적 시각을 지닌 일부 중화주의 세력의 논리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한국이 이 문제를 ‘국가주의’의 시각에서 접근하지 말고 장기적으로 유럽연합과 같은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이라는 큰 틀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임진철 중앙민족대학 객좌교수는 “국가주의의 관점에서 접근할 땐 고구려사 논쟁이 역사를 매개로 한 두 나라 사이의 ‘파워 게임’으로 전락할 뿐이며 한·중 양국이 영원히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문화다원주의적 공동체 대안을 가지고 접근할 때 ‘영토 귀속’에만 매달리는 중국의 일부 국가주의자들의 패권주의 논리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이징/이상수 특파원

한.중.일 시민사회 공동대처 필요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의 한국사 삭제에 대해 학계는 “정부 당국간 마찰을 일단 피하고 보자는 태도”라고 평가하고 있다. 정부 주도의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사 왜곡을 이끌었던 중국이 막상 이 문제가 외교현안으로 떠오르자, 또다시 학술문제로 공을 떠넘기려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동아시아 고대사는 물론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중간 ‘공통의 역사인식’의 토양이 대단히 척박하다는 데 있다. 백영서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근대사의 개별 사건에 대한 한·중 공동 학술회의가 열린 적은 있지만, 동아시아 현실과 관련된 역사 인식 전체를 공유하려는 시도는 없었다”고 말한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등에 대해 ‘비슷한 입장’을 취한 적은 있지만, 이것이 본격적인 한·중간 역사교류나 공동연구로 이어진 일은 없다는 것이다.

학계 차원의 공동연구를 위해서라도 우리 정부가 한·중 역사공동기구를 공식 제안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김우준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소 교수는 “현실적으로 정부 차원에서 역사공동기구를 제안하고, 중국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외교적 압력을 행사해서라도 관철시키는 등의 노력이 없이는 ‘학계 공동연구’는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한·중 역사학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현실적 장벽을 고려해, ‘시민사회’ 영역의 교류가 절실하다는 지적도 있다. 백영서 교수는 “동아시아가 처한 현실로부터 최근의 역사파동이 일어난 만큼, 고구려사 분쟁 등은 직업적 역사학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인 전체의 문제”라며 “역사학 교류에 얽매이지 않고 동아시아의 양심적 지식인의 연대의 틀에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임기환 고구려재단 연구위원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사태를 돌이켜보면, 시민운동 특히 일본 내 양심적 시민단체가 문제 해결에 큰 역할을 했다”며 “고구려사 문제도 그런 차원의 접근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오는 11일 서울 명동 전국은행연합회관에서 열리는 ‘한중일 공동 역사학술대회’는 그 전범이다. 일제 침략사 왜곡에 대한 공동의 역사인식을 위한 이 대회에는 한·일 시민사회단체는 물론, 이번에 ‘동북공정’을 주도한 중국사회과학원 소속 연구자들도 참여한다.

안수찬 기자

(한겨레신문 2004-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