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전적 교류…수탈 희귀본들 日도서관에 버젓이

베이징 도서관에서 조선 시대 책자인 ‘홍무정운(洪武正韻)’을 조사하던 중 ‘양안원(養安院)’이라는 장서인에 놀란 적이 있다. ‘양안원’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조선의 약탈 전적을 하사받은 일본인 신하의 장서인이다. 1476년 조선에서 간행된 목판본인 ‘홍무정운’은 임진왜란 중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어떤 경로를 거쳐 베이징에까지 흘러들어간 것이다. ‘홍무정운’만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고서적들이 고향을 떠나 이웃 나라로 흘러들어갔다. 그 많은 책들은 어떻게 한반도와 일본 열도,중국 대륙을 넘나들게 됐을까.

◇ 중국과의 교류,수출한 책도 많았다

중국의 책이 처음 들어온 것은 기원 전후,즉 삼국시대 초기인 듯하다. 기자가 고조선에 들어올 때 시,서,예,악 등과 관련한 책을 갖고 온 것이 효시. 왕인 박사가 285년에 ‘논어’ ‘효경’ ‘역경’ 등을 일본에 전해준 기록이 ‘일본서기’에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그 전에 이미 책이 전래됐음을 알 수 있다.

책은 한자의 전래,불교의 유입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372년에는 진(秦) 나라에서 고구려에 불경을,565년에는 진(陳) 나라의 문제(文帝)가 신라에 불교의 경론 1700권을 보냈다. 고구려 소수림왕,백제 침류왕,신라 눌지왕 때도 불경 수입의 기록이 남아있다. 이후 많은 전적이 수입됐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교류가 일방향이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의 전적도 다수 중국으로 역수출됐다. 고구려가 628년 ‘봉역도(封域圖)’를 당나라에 보낸 것이 책 수출의 시작. 신라는 810년에 불경을 당나라에 보냈고,고려는 959년에 중국에서 이미 유실된 ‘별서효경(別序孝經)’ 등을 후주(後周)에 보냈다. 961년에는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가 오월국에,대장경은 4차에 걸쳐서 북송에 역수출됐다. 잇따르는 내전으로 귀중한 책들이 인멸된 중국은 북송 때인 1091년에 128종의 구서(求書) 목록을 고려에 보내 전적 수입에 나서기도 했다.

그렇게 오간 책들은 규장각에 있는 중국 고서 6600여종,국립중앙도서관의 2000종 속에 남아있다. 베이징대학 도서관 역시 한국의 고전적 300여종을,대만은 457종을 보관하고 있다. 우리와 중국의 책 교류는 대체적으로 우호적이었지만 북송 때의 시인 소식(소동파·1036∼1101)이 고려에 하사한 서적이 거란에 유입된다는 이유로 책 유출을 금지하라는 상소를 3번이나 올리는 등 긴장이 고조된 때도 있었다.

◇ 일본과의 교류,일방적인 지원 혹은 약탈

일본과의 교류는 일방적이었다. 왕인 박사 이래 513년에는 오경 박사가 경전을,551년에는 불경을 전파했다. 특히 불경의 교류가 활발했는데 1105년 2종,1267년 2종,1388년의 1종,1392년 1종 등이 일본에 전해졌다. 조선시대에는 일본에 사절을 79회나 파견했고,‘팔만대장경’만도 1398∼1501년 사이에 18회나 전파됐다. 조선에서 건너간 책은 일본에서 유학,주자학 등을 일으켰고 서점의 발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이런 우호적인 분위기는 무너졌다.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 장수와 종군 승려들은 조선의 전적을 무수히 약탈해 갔고, 포로들을 동원해 책을 필사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병한 일본의 장수는 36명. 이들의 행적을 추적하면 약탈 문서의 소재지 파악이 가능한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을 거쳐 봉좌문고,천리대,국회도서관,창고관문고,서능부,내각문고 등으로 흘러들어갔다. 결국 숙종 38년인 1712년 ‘징비록’ ‘간양록’ ‘여지승람’ 등 국가 기밀과 관련 있는 전적의 일본 수출이 금지되기에 이른다. 일제 강점기 국가적 차원에서 이뤄진 전적 수탈은 아직 그 규모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이렇게 유출된 책 가운데는 국내에 없는 희귀본이 많다. 동양문고가 소장한 고려본 ‘금강반야바라밀다경(金剛般若波羅蜜多經)’,게이오 대학의 고려권자본 ‘대방광불화엄경이세문품지이(大方廣佛華嚴經離世問品之二)’,국회도서관의 계미자본 ‘찬도호주주례(簒圖互註周禮)’ 등이다.

더구나 이들 고서는 임진왜란 이전의 판본이 많아 사료적 가치가 크다. 특히 한국에는 아예 없거나 있어도 낙질(落帙·여러 권으로 한 질을 이루는 책에서 빠진 책)뿐인 판본이 일본에는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어 그 가치는 더욱 크다. 현재 일본의 15개 도서관에는 한국에 없는 완질(完帙)이 104종이나 소장돼있다.

반면 일본에서 수입된 전적은 많지 않다. 근대 서구 문화가 유입되기 전까지 일본의 출판 문화가 후진적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의천이 불경을 들여온 것을 제외하면 1600년 ‘풍토기(風土記)’와 1811년 ‘이퇴계서초(李退溪書抄)’ 정도. 일본이 봉건 사회에서 명치의 자본주의 개혁기로 들어서는 19세기 후반이 되면 수입이 비교적 활발해지는데 1880년 수신사 김홍집이 들여온 외교서 ‘사의조선책략(私?朝鮮策略)’ 등이 대표적이다.

1966년 한일회담이 조인되면서 일본 정부는 165종 852책을 반환했다. 분량도 만족스럽지 못할 뿐더러 귀중본은 모두 제외돼 자료적 가치는 거의 없다. 일방적으로 주거나 빼앗기기만 하고 받아온 것은 미미한 게 한·일 전적 교류의 현실이다. 역사적으로 정상적인 교류에 의한 하사와 헌납은 인정해야하지만 약탈과 수탈에 의한 것이라면 반드시 찾아와야 한다.

<조형진/강남대 교수>

(국민일보 2004-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