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학자도 발해는 고구려 계승 인정

“중국 학자들과는 거의 교류가 없습니다. 책, 논문 교환이 고작입니다.

러시아 학자들이 중국 내 발해 유적 발굴에 참여토록 중국이 허락하지 않고, 러시아도 마찬가지입니다.”고구려를 계승한 발해(698~926년)는 함경도, 평안도 지역 대부분과 중국랴오닝(遼寧)성, 지린(吉林)성, 헤이룽장(黑龍江)성, 러시아 연해주 상당부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국가였다. 그래서 발해에 대해서는 한국과 중국 못지 않게 러시아 학자도 관심이 높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러시아과학원 극동지원의 역사고고민속학연구소 발해 연구자들이 9일 고려대에서 최근 연해주 지역의 발해 유적 발굴 성과에 대한 보고회를 가졌다. 블라디슬라브 볼딘 중세연구실장과 연구원 제냐 겔만, 유리 니키틴은 김정배 고구려연구재단 이사장, 한규철(경성대) 송기호(서울대) 교수 등 한국 학자들과 1990년대 중반 두 차례 러시아의 발해 유적을 공동 발굴하는 등 10년 넘게 학술 교류를 이어왔지만 자체 발해 유적발굴 결과를 한국에 와서 직접 설명하기는 처음이다.

이들의 방한은 고구려, 발해 등 고대사를 두고 한국과 중국의 역사분쟁이 불거져 있어 의미가 더욱 각별하다. 김정배 이사장은 “10년 전 발해 유적조사를 위해 러시아에 갔을 때 그곳 고고학자들은 발해를 중국의 지방정권 정도로 알고 있었다”며 “한국과 거의 교류가 없는 상태에서 중국쪽 연구물을 일방으로 수용한 결과”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 학자들과 교류의 물꼬를 트고 공동 발굴 작업까지 진행하면서 러시아 학자들은 점차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인식을 갖게 됐고, 지금은 그것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보고회에서 블라디보스토크 북쪽 우수리스크 인근의 체르냐티노 발해 고분발굴 성과를 설명한 니키틴 연구원은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의 고구려실 유물을 둘러보면서 발해 고분 출토 유물과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했다”며 “발해 문화는 지금까지 비교해본 어떤 문화보다도 고구려와 가장 유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초기 발해 문화는 말갈 문화와 혼재돼 있지만시간이 지날수록 차별성이 뚜렷해진다”고 말했다. 한카호 남쪽 고르바트카 발해 성터 발굴을 진행하고 있는 겔만 연구원 역시 지난해 발굴한 유물 중 용도를 알 수 없었던 것이 여럿 있었는데 고려대 박물관에서 거의 비슷한 한반도 고대 유물을 확인, 수공업에 사용한 물건임을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고구려의 독특한 문화인 온돌이 고르바트카 유적에 뚜렷히 남아있다며 현장 사진과 함께 자세히 소개했다. 러시아는 1958년부터 발해 연구를 시작했으며 1970년 역사고고민속학연구소가 세워지면서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현재 이 연구소의 발해 전문 연구자는 12명이다. 김정배 이사장은 “중국의 발해 유적 발굴ㆍ연구에는 한국학자들이 참여할 여지가 없지만 러시아와는 협력의 기회가 열려 있다”며 “특히 러시아의 발해 성터와 고분은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점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유적들”이라고 말했다. 블라디슬라브 볼딘(왼쪽) 실장이 연해주 남부 크라스키노의 발해 성터 발굴 성과를 소개하고 있다.

(한국일보 2004-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