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중국인들 '고구려史는 한국史'로 인식"

중국인들은 예전부터 일반적으로 고구려를 중국사의 일부가 아니고 한반도에 사는 한민족의 역사로 간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베이징(北京)의 인기있는 일간지 베이징청년보 4일자 베이징 지명 유래를 설명하는 `베이징 지명'이라는 칼럼에 게재된 `당나라 때 가오리잉(高麗營)이라는 지명 생겨'라는 제목의 칼럼을 보면 중국인들의 이같은 일반적인 관념이 감지돤다.

칼럼은 베이징시 교외에 있는 순이(順義)현 가오리잉(高麗營)진의 지명 유래를 설명하면서 고려를 한민족을 통칭으로 하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고구려를 압록강 동쪽에 있는 고려국이라고 지칭했다.

둥팡창(東方朝)라는 저자는 칼럼에서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서기 688년에 고려를 멸망시킨 후 투항한 고려 장군 흑치상지(黑齒常之)와 그 가족들을 끌고 회군중 흑치상지의 가족들을 베이징 부근에 배치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 이세민이 멸망시킨 것은 고구려이고 당나라 장군 설인귀(薛仁貴)에게 투항 한 흑치상지는 백제 부흥 운동을 이끈 백제인이었다.

"흑치상지 가족들은 고려인으로 이 곳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았고, 이들의 보호를 위해 군대가 주둔했기 때문에 가오리잉이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칼럼은 말했다.

흑치상지는 이세민을 따라 당시 당나라 수도 창안(長安.지금의 서안<西安>)으로 간후 당나라를 위해 위업을 세웠으며. 이런 사실은 TV 연속극 `다밍관츠(大明官詞)'에도 나온다는 것이다.

칼럼은 "삼국시대 후기 이후 군벌들이 난무, 랴오닝(遼寧) 지방에 신경쓸 틈이 없어 압록강 동쪽의 고려국이 점령하도록 방치하다 수 문제(隨 文帝) 양견(楊堅)이 중국을 통일한후 고려 정벌에 나섰으나 국력 부족으로 실패했고, 이어 수양제(煬帝) 양광(楊廣)과 당태조 이연(李淵)도 고려 정벌 랴오닝 실지 회복에 실패했다"고 쓰고 있다.

이는 당시 고구려가 중국과 대치하며 전쟁을 벌인 한반도 국가로 묘사돼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칼럼은 "가오리잉의 고려 유민들은 명나라 때 랴오닝성 잉커우(營口)로 이주해 이 곳에는 이름만 남고 고려인(현재의 조선족)은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중국인들은 예전부터 상당수가 고려인을 한민족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고구려를 고려에 포함시킨 것을 보면 고구려 역사는 중국사의 일부가 아니라 한국사로 간주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연합뉴스 20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