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북방 고대사] ①'문화공동체'한반도와 만주
만주ㆍ한반도 유물 닮은 꼴… 중국과는 '딴판'
한반도와 만주를 나누는 압록강과 두만강은 오늘날 한국과 중국 영토를 가르는 국경선이다. 그러나 이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국경’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과는 달리 두 강의 양쪽이 별다른 차이가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중국 쪽에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지리적으로도 압록강과 두만강은 단절의 선이 되기 어렵다. 강 폭이 좁은
곳은 작은 배 한 척으로도 쉽게 건널 수 있고, 가뭄이 들거나 얼음이 얼면 걸어서도 오고 갈 수가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은 그렇게 선사시대부터
정치적·문화적 장벽이 아니라 사람과 문화의 교류 통로 역할을 해왔다.
한반도에 살았던 첫 번째 사람들인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는 약 17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처음 출현해서 100만년
전에는 동아시아에 도착했고, 라요닝 성의 발해(渤海) 연안 지역을 경유하여 한반도로 들어왔다. 뒤이어 오늘날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역시 아프리카에서 시베리아와 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진출했다.
이들이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만주와 한반도의 선사시대 ‘주민(住民)’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이 주로 사용했던 좀돌날과 같은
소형 석기와 이것을 만드는 데 이용된 쐐기 모양의 몸돌은 만주와 한반도에서 모두 발견돼 두 지역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말해준다.
한반도와 만주는 농경문화의 탄생 과정에서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만주 지방에서 정착 농경이 출현한 시점은 기원전
6000년경까지 올라간다. 처음에는 조와 기장 등 밭농사가 시작됐고 이어 벼를 재배하는 논농사가 발전했다. 이렇게 출현한 정착 농경은 점차
동쪽으로 확산되면서 랴오허(遼河) 하류 유역과 요동반도 지역을 거쳐
한반도에까지
보급되었던 것이다.
만주와 한반도가 선사시대에 하나의 문화공동체였음을 말해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이다.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토기를 보면
표면에 문양을 눌러 새긴 것들이 주류다. 만주 지방의 토기들과 매우 닮았다. 특히 한반도 북부 지역의 토기는 요동반도 및 지린성 동남부 지역
토기와 밀접한 관련을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와 만주 대부분 지역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새김무늬 토기는 황하 중류 유역 양샤오(仰韶) 문화의
채색토기 전통과는 뚜렷한 대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한반도와 만주가 중국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문명권이었음은 청동기 문명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중국의 중원 지역은 찬란한 청동 문명이 발전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상(商) 나라와 주(周) 나라에서 사용한 그릇은 주로 의례
활동에 사용된 예기(禮器)들로, 그 중에서도 청동 그릇을 대량으로 제작해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만주 지방에서 발견되는 청동기는
주로 소형의 개인적인 도구·무기·장신구다. 그리고 한반도의 청동기 종류도 만주 것과 매우 비슷하다.
만주 지방에서 청동 야금술(冶金術)이 출현하게 된 것은 중국 북방의 초원지대를 따라 형성된 북방 청동문화의 독자적인 발전 결과였으며,
한반도의 청동야금술 역시 이러한 북방 지역 청동기 문화 전통의 일부이다. 북방 청동기 문화의 대표적 유물은 곡선의 칼날을 가진 청동 단검으로
‘비파형 동검’ 또는 ‘요녕식 동검’이라고 불리며 예맥(濊貊) 문화권 또는 고조선 문화권의 대표적 유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중국 중원
지역의 직선형 날을 가진 동검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한반도와 만주의 문화적 공통성은 또한 언어와 형질(形質)적 특성에서도 뚜렷하게 확인된다. 언어 계통상 중국어는
중국·티베트어족(Sino-Tibetan languages)에 속하고, 한국어는
우랄·알타이어족 가운데 알타이어계와 가장 가까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대 한국어는 부여·고구려·옥저·동예 등에서 사용한 부여계어(夫餘系語)와
마한·변한·진한 등에서 사용한 한계어(韓系語)가 변화 발전한 것으로, 늦어도 기원 전후의 시기에는 한반도와 만주 지방에 공통의 언어권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도대체 만주 지방이 중국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첫 계기는 언제부터일까? 기원전 3세기 초 전국시대(戰國時代) 연(燕) 나라의 정치
세력이 허베이(河北) 북부의 연산(燕山) 지역을 넘어 확대되면서 만주 지역에 연나라의 군현(郡縣)이 설치된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부터
연나라의 철기 문화, 밀폐 가마와 물레 사용에 의한 토기제작 기술, 목관(木棺)을 사용하는 매장 풍속 등이 만주 지역에 본격적으로 확산되며
한반도에도 유입된다. 이런 중국 문화의 보급은 한무제(漢武帝)의 고조선 정복과 한사군(漢四郡) 설치를 계기로 더욱 확산된다.
그러나 이는 주로 발해 연안 및 서(西)북한 지역에 집중됐을 뿐, 만주의 다른 지역에서는 여전히 토착적 문화 전통이 지속됐다. 그리고
중국과의 접촉이 오히려 각 지역 사회의 발전을 촉발하여 부여·고구려·옥저·동예·삼한 등의 정치적 발전을 초래하였다. 중국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이후에도 만주의 대부분 지역은 여전히 독자성을 유지했던 것이다.
선사시대의 한반도와 만주는 이처럼 문화적·언어적·형질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므로 만주를 한국고대사의 영역에 포함시키는
것은 당연하며 또 필요한 일이다. (박양진 충남대 고고학과 교수 / 중국고고학 전공,
만주 지역 발굴 다수 참여) (조선일보
20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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