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인의 주거 문화
조선 시대가 배경인 사극들을 보면, 온돌방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는 또 앉아서 생활 하기에 편하도록 집안의 가구도 모두 높이가 낮았습니다.
그런데, 뜀박질 잘 하고 말 타며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던 고구려 사람들도 조선인들처럼 좌식 생활을 즐겼을까요?
▲ 잠자는 공간만 따뜻한
'쪽구들'
고구려인들은 실내에서도 엉덩이를 방바닥에 붙이며 사는 좌식 생활보다는 요즘 아파트에서 사는 것처럼 입식 생활을 많이 했습니다.
고구려의 겨울은 몹시 추웠습니다.
이들은 추위를 피하기 위해 온돌을 만들어 실내를 따뜻이 했습니다.
하지만 방 전체에 구들장을 놓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잘 수 있는 공간만 온돌방으로 꾸몄습니다.
이를 쪽구들이라고 합니다.
군사 유적지인 아차산 4보루(작은 성)의 발굴 때에도 12 개의 쪽구들이 발견됐습니다.
‘ㄱ’자형과 직선형 두 종류의 쪽구들은 옆에 평평한 돌판을 세워 벽을 만들고 그 위에 납작하고 긴 돌을 뚜껑을 덮은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쪽구들이 끝나는 부분은 원형으로 마무리돼 있는데, 여기에 연기가 빠져 나가는 굴뚝을 세웠습니다.
▲ 방 안에 의자·평상·장방 놓아
이렇게 전체가 아닌 부분 난방을 했다면, 나머지 공간은 무엇이 있었을까요. 각저총 널방 북벽에
그려진 주인공 부부의 실내 생활도를 보면 이들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생활도에서 남자 주인공은 꽤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 반면, 그의 두 부인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습니다.
부인들이 앉은 곳은 주황색으로 칠해져 있고, 방바닥이 방 바깥보다 약간 더 높은 곳으로 보아 쪽구들 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방 안의 나머지 공간에는 이처럼 의자와 평상ㆍ장방을 놓아 그 위에 앉아서 생활했습니다.
평상은 평평한 넓은 의자로 혼자 또는 여럿이 함께 앉기도 했는데, 평상 아래에는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았습니다.
즉, 실내에서도 신발을 신었던 것입니다.
장방은 평상의 세면에 낮은 둘레 벽을 치고, 천으로 지붕을 만들어 마치 작은 방처럼 꾸민 곳입니다.
장방은 주로 신분이 높은 귀족이 즐겼던 것으로 여기에 비단이나 자수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귀족들의 정면 초상화는 대개 장방에 앉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장방에는 휘장(커튼)을 둘러 때로는 접거나, 내려서 밖을 볼 수도 있고 없게도 했습니다.
휘장은 방에도 둘러서 내부의 공간을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평상과 장방ㆍ휘장 문화는 조선 시대에 와서 온돌과 마루 문화가 발전하면서 점차 사라졌습니다.
특히 온돌이 방 안 전체를 따뜻이 하게 되면서, 신을 벗고 실내에 들어와 살게 된 것은 주거 문화의 큰 변화였습니다.
▲ 부엌ㆍ마구간ㆍ차고는 따로 지어
집은 또 용도에 따라 건물을 별도로 지었습니다.
부엌ㆍ마구간ㆍ고기 창고ㆍ식량 창고ㆍ방앗간ㆍ수레를 넣어 두는 차고는 물론이고 남녀가 사는 건물도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또 연못과 활 쏘기를 연습할 수 있을 정도의 마당도 있었고, 노비들의 잠자는 장소도 따로 있었습니다.
기와 지붕을 얹은 귀족들의 집과는 달리, 가난한 사람의 집은 초가 지붕 혹은 나무껍질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북쪽 사람들은 겨울철 추위를 막기 위해 무덤처럼 생긴 굴을 파고 지하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고구려 서민들의 집에는 쪽구들이 있어서 난방을 했습니다.
고구려 시대의 집들은 나무와 흙으로 벽체를 만들어 불에는 약하지만, 시멘트 집보다 보온 효과가 뛰어나 쪽구들에다 부분적으로 화로를 통한
난방을 해 한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서민들의 집은 집 내부에 여러 건물들이 없었고, 마구간이나 창고 정도만이 따로 만들어졌을 뿐입니다.
옛 사람들이 쓰던 가구류 대부분은 나무로 만든 것들입니다.
따라서 불에 타거나 훗날 연료 등으로 태워져 고구려의 가구 가운데 현재 전해 오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벽화나 무덤에서 나온 나무 조각을 보면 고구려에서는 옻칠을 한 칠기류 제품을 많이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옻칠을 하면 벌레나 열ㆍ직사광선으로부터 나무를 보호할 수 있고, 때도 잘 타지 않습니다.
고분 벽화에는 의자와 탁자ㆍ소반ㆍ책상 등이 등장하지만, 장롱 등 다른 가구류를 더 이상 확인할 수 없어 당시 사람들의 실내 생활을 모두 다
알 수 없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소년한국일보 2004-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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