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학생들은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백성들은 글공부ㆍ군사 훈련 '경당' 귀족의 국립 대학 '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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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고구려 군사
유적지에서 출토된 토기. 다양한 글자가 적혀 있다. | 문지기 등 가장 미천한 신분까지 경당서 책 읽게 해
고구려 시대에는 학교가 존재했을까요? 당시 학생들은 무엇을 배웠을까요?
그 때 어린이들도 지금처럼 학원 과외를 많이 받았을까요?
그래요. 고구려 시대에도 물론 학교는 있었습니다.
그 때에도 학생들이 1등을 하려고 열심히 노력을 했겠지요. 다만 과외 공부까지 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문헌에서 살펴보면 고구려 사람은 공부를 매우 열심히 했습니다.
중국인이 쓴 ‘구당서’라는 책에는 고구려 사람들은 워낙 글읽기를 좋아해 각
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이를 경당이라 부르고, 문지기 혹은 말의 먹이를 주는 사람과 같은 가장 미천한 신분에 이르기까지 밤낮으로 이곳에서 책
읽기와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고구려에서 미천한 신분에 이르기까지 글공부를 했다는 것은 조선 시대와 비교해
보면 큰 차이가 납니다.
조선에서는 일반 농민들이나 노비들은 서당에서 공부를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서기 191년까지 농부로 지냈던 을파소는 평소 엄청난 공부를 한
지식인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하루 아침에 국상에 임명될 수가 있었습니다.
주변에서 살아 남기 위해 백성들에게 글 가르치고 활쏘기 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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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 무용총에
그려진 활쏘기 장면 벽화. 고구려 사람들은 경당에서 배운 활쏘기를 평소에 사냥
등을 통해 솜씨를 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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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고구려 군사 유적지에서 나온 각종 그릇에는 소유자를 표시하는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이를 통해 고구려 군인 대부분이 교육을 통해 글자를 알고 있었음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고구려에서 이처럼 글공부를 강조한 것은 살아 남기 위한 자구책이었습니다.
백성들이 글을 알아야 국가에서 행한 법령을 집행하기가 쉽고, 상거래를 할 때에도 서로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또 군사들도 보다 정교한 군
작전을 쉽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만약 군인과 백성이 글을 전혀 모른다면, 군대의 작전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상거래도 위축되고 법을 몰라 죄를 범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가 약해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주변의 많은 적들과 상대하면서 살아 남기 위해서 고구려가 선택할 것은 국민
개개인을 교육시켜 사람들을 스스로 강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고구려도 초기에는 ‘좌식자’라 불리는 소수의 전문 전사 집단이 전쟁을
담당했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커지면서 전쟁에 동원할 군사의 숫자가 많아지고, 백성들도 군사로 활용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일반 백성에게 군사 훈련을 시켜야 했습니다. 그로 인해 경당을 세우고 활쏘기ㆍ말타기 등과 함께 글공부도 함께 시킨 것입니다.
중국인들이 기록한 글에는 유교 경전인 시경ㆍ서경ㆍ역경ㆍ예기, 춘추ㆍ사기 등의 역사서, 옥편을 비롯한 글자학 서적, 문선과 같은 문학책까지 폭넓은 중국 서적이 고구려에서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당 등에서 교육한 책들이 중국에서 들여온 책들만은 아니었겠지요.당연히 고구려의 역사와
종교 사상과 관련된 서적을 더 많이 가르쳤습니다. 고구려는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유기 100 권을 만들었습니다.
경당에서는 또 글공부 못지않게 전사를 양성하는 교육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신라 화랑 제도와 많이 비슷합니다. 경당에서 전사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평소에도 사냥 등을 통해 말 타고 활 쏘는 기술을 익히는 데
힘썼습니다. 이를 열심히 해야 나라의 관리도 되고 출세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육 기관 태학 세워 전문적 지식인도 길러 내
소수림왕은 372년 태학이란 교육 기관을 세웁니다.
신라에서는 태학과 비슷한 국학을 682년에 만들기도 합니다.
태학은 교육을 담당하는 박사들이 학생을 가르쳤는데, 귀족의 자제들을 9 년 정도 가르쳤고, 이곳을 졸업한 학생들은 관리를 도맡아 했습니다.
이처럼 체계적이고 전문 지식을 배운 이들이 나라의 관리가 되면서, 고구려
정부의 능력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391년에 등장한 광개토대왕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었던 것도 태학에서 배출된 전문적 지식을 갖춘 관리들이 이 때 많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태학 박사 이문진은 600년 고구려 역사를 기록한 신집 5 권을 만들었고, 역시 태학 출신으로 생각되는 을지문덕은
멋진 시를 짓는 뛰어난 지식인이었습니다.
소수림왕이 국력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만든 태학이 광개토대왕 시기 고구려
번영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가 강대국이 된 것은 경당에서 많은 백성을 교육했기 때문입니다.
교육은 국가의 최고 자원입니다.
어린이 여러분들도 열심히 공부하여 많은 지식과 지혜를 갖출 때 우리 나라는 분명 더 좋은 나라, 더 강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소년한국 2004-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