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연구가 단국대 윤내현 교수
질타·모함·의혹과 싸운 고조선 연구 30년
고조선은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른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였다. 1980년대 초 윤내현 교수의 주장은 사학계의 통설을 뒤엎으며
끝내 국사교과서를 수정하게 만들었다. 정년을 앞둔 노학자로부터 한국 고대사 연구 30년을 듣는다.평소 윤내현 교수(64·단국대 대학원장·동양사)는 말을 아끼고 몸을 낮추는 스타일이다. 30년 가까이 한국 고대사에 매달리면서 ‘비정통
역사학자’ ‘국수주의자’ ‘과도한 민족주의자’ 심지어 ‘북한 추종자’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기에 자연스레 몸에 밴 조심성이리라 짐작된다. 그런
윤교수가 요즘 부쩍 말수가 늘고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정년퇴임까지 2년도 채 남지 않은 마당에 이것저것 가릴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9월1일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가 추죄한 학술회의에 참가해 ‘한민족의 기원과 중심세력’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윤교수는
“우리민족과 문화의 기원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자신감 부족 아닌가”라며 “초창기에는 우리 학문의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지만 이제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학계의 통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윤교수가 주장해온 ‘한민족 자생설’은 한민족이 외부에서 이동해온
것이 아니라, 한반도와 만주지역 토착인들이 연합해 우리 민족과 문화를 형성했다는 내용이다. 우리 민족과 문화의 기원을 끊임없이 몽골이나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등지에서 찾아온 ‘한민족 외래설’ 혹은 ‘민족이동설’을 정면에서 부정한 것이다.
최근 윤교수는 ‘우리 고대사-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라는 책도 내놓았다. 1978년 첫 저서 ‘상왕조사(商王朝史)의 연구’를 발표한
이래 ‘상주사(商周史)’ ‘한국 고대사 신론’ ‘고조선 연구’ 등 중국사와 한국 고대사 분야에서 교과서나 다름없는 책과 논문을 썼지만 전문
학술서가 아닌 대중서를 낸 것은 처음이다. 그 책이 발매 몇 주 만에 2쇄에 들어갔다.
‘우리 고대사’에는 고대사 분야에서 새로운 학설을 발표할 때마다 쏟아진 질타와 모함과 의혹의 눈길을 묵묵히 감내하며 학문적 홀로 서기에
매진해온 한 노학자의 삶이 담겨 있다. 책에서 윤교수는 “학자들이 할 일은 그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밝혀내거나 잘못 전해온 것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했다. 새로운 주장을 한 학자는 그것을 이해하고 동조하는 학자가 나타날 때까지 홀로 서기를 해야 한다. 윤교수의 홀로 서기는
길었지만 이제 그는 외롭지 않다. 그의 견해에 동조하고 격려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만큼 고대사에 대한 우리의 시각도 많이 바뀌었다.
단국대학교 대학원장실에서 윤내현 교수와 마주했다. 요즘 그가 무엇보다 비중을 두는 일이 북한 역사학계와의 교류다. 지난 10월 개천절을
맞아 평양에서 제2차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남북공동학술토론회’가 열렸다. 윤교수가 회장직을 맡고 있는 남한의 ‘단군학회’와 북한의
‘조선력사학학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행사였다. 1년 전 제1회 행사 때는 “평양에서 남북한이 공동 개최한 최초의 학술대회”라며 언론의 반응이
야단스러웠던 것에 비해 2회는 소문 없이 지나갔다. 윤교수는 첫 행사가 물꼬를 튼 수준이라면 이제야 남북한이 서로 말문을 텄는데 막상 관심 갖는
이가 별로 없다며 아쉬운 기색이다.
남북한 공동발굴 기대
“각자 준비해간 논문을 발표하고 끝난 1회 때와 달리 꽤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토론과 질의응답이 이어졌습니다. 남측 학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 1993년 발굴한 단군릉이죠. 알다시피 단군릉의 발굴로 북한에서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령에서 평양으로 수정됐고, 고조선 건국
시기도 기원전 3000년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았습니까. 또 최근 북한에서 발굴된 청동기 유적들의 연대가 기원전 3000~2800년이라고
발표됐는데 우리 쪽에서는 북한이 의도적으로 연대를 올린 것 아니냐고 의심하기도 해요. 실제 이번 학술대회에서 남측 학자들이 ‘당신들이 제시한
연대에 의문을 갖고 있다, 방사선탄소를 이용한 연대측정 등 과학적인 방법으로 다시 조사할 생각은 없느냐, 객관성을 위해 외국기관에 의뢰하는 것은
어떠냐’ 등등의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북측은 ‘우리는 방사성탄소 측정시설이 없다, 그러나 이 방법은 시료 채취과정에서 뼈에 손상을 주기
때문에 곤란하지 않느냐, 대신 전자상자성공명법으로 2개 기관에서 각각 24번, 30번씩 측정한 것이기 때문에 객관성은 확보됐다고 본다’고
답했죠. 이번 학술대회의 수확은 공동연구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북측에 의문이 있으면 함께 풀어보자, 어렵더라도 발굴현장을 직접
답사할 기회와 발굴보고서를 제공해달라고 했습니다.” 윤교수는 또 북한측 학자들이 예상외로 남한의 연구 동향에 대해 잘 알고 있어 놀랐다고 전한다.
“김일성대학의 한 젊은 학예연구사가 발표한 내용 중에 ‘천문학을 이용해 ‘환단고기’ 기록의 일부를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나와
있지만’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9월1일부터 고등과학원 물리학부로 옮김)가 쓴 책의 내용이거든요. 아, 저
사람이 역사 전공자가 아닌 천문학자의 연구까지 벌써 읽었구나 하고 감탄했죠. 북한 학자들은 남한 학자들의 연구방향과 업적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어 만나면 금방 알아봅니다. 처음 만난 북한 학자가 내 책을 읽었다기에 어떻게 보았느냐고 했더니 강인숙, 손영종 교수 등 선생님의 책을
빌려보았다는 거예요. 예전에 그분들을 만났을 때 직접 책을 드린 적이 있거든요. 사실 북측은 연구비에 관심이 많아요. 재정 지원만 약속하면 공동
발굴도 가능하다고 봐요.”
윤교수는 단군릉 발굴과 단군조선에 대한 북한의 관심이 설령 체제 유지라는 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해도, 그로 말미암아 민족의
동질성이 회복되어 통일에 도움이 된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무조건 의심하기보다 남북한 공동연구를 통해 상고사 연구의 과학성과 실증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
이로 인해 한때 윤교수에게는 ‘북한학설을 따르는 자’라는 의혹이 따라붙었다. 거꾸로 고대사의 중요성을 역설하거나 민족 정체성을 강조하면
독재정권에 협력하는 학자로 매도당하던 시절도 있었다. 요즘은 고대사를 논하거나 민족의 가치관을 말하면 세계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윤교수는 자신의 고대사 연구 30년을 이렇게 자평한다.
“우리 고대사, 특히 고조선을 연구하고 그에 대한 새로운 연구결과들을 발표한 탓에 선배교수에 대한 예의도 지킬 줄 모르는 놈, 사상적으로
의심스러운 놈, 남의 것을 베껴먹기나 하는 놈, 역사를 정통으로 공부하지 못한 놈, 독재정권에 도움을 준 놈, 비민주적인 사고를 가진 놈,
세계화에 발 맞추지 못한 시대에 뒤떨어진 놈 등으로 매도된 셈이다.”(‘우리 고대사’에서)
갑골문 연구에서 한국고대사로
원래 그의 전공은 동양사, 그 중에서도 중국고대사였다. 1960년대에 동양 고대사를 전공한다고 하면 당연히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중국사였지 한국사는 생각지도 않았다. 중국 고대사를 연구하던 중 자연스럽게 갑골문을 접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갑골문을 봤다는 사람도 드물 만큼
자료가 귀해서 그는 일본, 홍콩, 방콕을 드나들며 자료를 긁어모아 논문을 썼다. 석사논문 제목은 ‘갑골문을 통해 본 은왕조의 숭신사상과
왕권변천’이었고 박사논문은 ‘상왕조사 연구-갑골문을 중심으로’였다.
“당시 동양사학회 원로 교수들이 논문심사를 하셨는데 ‘정말 갑골문에 이런 기록이 나오느냐’고 물을 정도였으니 이 분야가 얼마나 생소했는지
알 수 있죠. 학위는 받았으나 연구는 미진해서 다시 하버드대로 갔습니다. 하버드대 옌칭도서관의 중국 자료들을 보는데 한국 관련 부분들이 자꾸
눈에 띄는 겁니다. 특히 기자(箕子)에서 눈을 뗄 수 없더군요. 조선시대까지는 기자조선을 인정했어요. 오히려 단군을 부정하고 중국의 기자로부터
역사가 시작됐다는 기자동래설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근대적인 역사 연구가 시작되면서 고조선(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가운데 기자조선의
존재를 부인하게 됐죠. 곧 기자조선은 중국인이 꾸며낸 이야기로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갑골문에 엄연히 기후(箕侯)라 해서 기자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실존인물임에 틀림없는데 조선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습니다.”
윤교수는 ‘중국의 원시시대’와 ‘상주사’의 집필을 준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기자’와 한국 고대사 문제에 파고들었다. 기록에 따르면 기자는
상(商)나라 왕실의 후예로 기(箕)라는 곳에 봉해진 제후였으나 상나라가 서주 무왕에 의해 망하자 조선으로 망명했다. 중국 ‘사기’의
‘송미자세가’를 보면 ‘무왕은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으나 신하는 아니었다(武王乃封箕子於朝鮮 而不臣也)’고 되어 있다. 그동안 이 문구는 기자가
제후에 봉해져 고조선을 통치했다는 식으로 확대 해석됐다.
그러나 윤교수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할 때 국경이 요동지역까지라고 기술된 부분을 떠올렸다. 당시 요동의 경계는 북경
바로 옆 갈석산이었다. 만약 그곳이 국경이었다면 갈석산 동쪽지역인 한반도와 만주 일대가 모두 고조선 땅이 된다.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렇게 고조선의 강역(疆域·한 나라의 통치권이 미치는 지역)을 설정해놓고 보니 다음 이야기들이 딱딱 아귀가 맞았다. 기자가 망명한
조선은 중심지인 평양이 아니라 갈석산 부근이었다. 기자는 평소 친분이 있던 서주 무왕의 동생 소공이 다스리는 연나라(제후국)와 접해 있던
고조선의 변방을 망명지로 택한 것이다. 물론 여차하면 고향으로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기자는 ‘고조선 변방의 제후’가 됐던 것이다.
윤교수는 이와 같은 내용의 학설을 정리해 1982년 ‘기자신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중국사 전공자의 외도를 반기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고조선을 대동강 유역의 조그만 부족집단 정도로 인식해온 국내 사학계에서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르는 고조선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그후 학계의 역풍이 몰아쳤다.
“제 학설이 자꾸 문제가 되니까 당시 국사편찬위원장이었던 이현종 선생께서 ‘내친김에 중국 고대문헌에 고조선이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논문을
써보라’고 하셨습니다. 1984년 무역회관 대강당에서 그 논문을 발표하게 됐죠. 그런데 대선배 교수 한 분이 ‘오늘 너무 강하게 주장하면 안
된다’고 하시는 거예요. 저는 농담인 줄 알고 그냥 쓴 대로 읽었어요. 토론시간이 되자 그 분이 책상을 마구 치면서 ‘영토만 넓으면 좋은 줄
아느냐,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다’며 화를 내시더군요.” 北 추종자라는 비난이때 윤교수는 결심했다. ‘기자만 연구하고 한국사에서 손을 떼려 했는데 나머지 문제까지 내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여기서 그냥
물러서면 내 주장이 잘못된 것처럼 받아들여지지 않겠는가.’
그 뒤로 중국사를 제쳐두고 한국 고대사를 집중 연구했다. 물론 중국사 전공을 십분 이용해 중국 고대문헌에 나타난 고조선의 국경 기록을
샅샅이 조사했고 이어 고조선의 사회구조, 통치조직 등으로 연구 범위를 넓혔다.
“학계에서 만주지역을 언급한 분은 신채호, 정인보, 장도빈 등 소위 민족주의 사학자들인데, 해방 후 우리 사학계는 그분들의 연구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냥 독립운동 하던 분들이 애국심, 애족심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쯤으로 취급했죠. 물론 그분들의 연구에는 각주가 없기 때문에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했는지는 알 턱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정인보 선생의 ‘조선사연구’에는 ‘고조선의 국경은 고려하다’라고 되어 있는데 문헌에는 도대체
‘고려하’란 지명이 나오질 않아요.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도 ‘고조선의 서쪽 끝이 헌우락’이라고 하는데 헌우락이 어딘지 알 길이 없으니
아예 무시한 겁니다. 그런데 중국 문헌을 찾다 보니 ‘요사(遼史)’에 헌우락이 나오더군요. 또 옌칭에서 중국 고지도를 뒤지다가 ‘고려하’라는
강명을 발견했습니다. 대능하에서 북경으로 조금 가면 ‘고려하’가 있고 상류에 고려성터가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시대 만주에 살던 분들께 물어보니
고려성터가 있고 일본이 세운 팻말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신채호, 정인보 선생은 현지답사도 하고 문헌도 보았던 겁니다. 우리가 거들떠보지 않는
동안 북한이 그 학설을 이어받았습니다.”
그 무렵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하는 ‘한국사휘보’에 그를 비방하는 글이 실렸다. ‘북한의 어용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자’라는 내용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누군가 정보기관에 “고대사 분야에서 북한학설을 유포하는 자가 있다”고 고하는 바람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일까지 생겼다.
이처럼 윤교수는 동양사 분야에서 손꼽히는 권위자였지만 한국사에서는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동양사로 가면 강단사학자, 한국사로 가면
재야사학자가 되는 이중생활을 계속했다.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한국사)는 ‘역사학의 역사’(지식산업사)에서 1980년대 윤내현 교수의 활동을
이렇게 요약했다.
“한국고대사의 첫 장에 해당하는 고조선 연구는 1980년대에도 부진했다. 문헌이 빈약하고 고고학적 성과도 북한이나 중국과 관련되어 있어서
현장감을 가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야 사학자들의 주장과 비슷한 학설을 내세운 것은 윤내현 교수다. 그는 주로 문헌자료에
의거하여 고조선의 성립시기를 기원전 2300년 이전으로 추정하고 그 도읍은 지금의 평양에서 시작해서 중국 난하 유역으로 팽창했다가 다시 평양으로
후퇴한 뒤 한나라 무제에 의하여 망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의 고조선 연구는 1994년 ‘고조선연구’로 정리되어 출간되었다.”
한교수는 덧붙여 “윤내현의 연구는 고고학의 뒷받침을 받지 못한 것으로 학계의 반응은 매우 냉담했다”고 적었다.
고조선 재평가 열풍
그러나 학계의 반발이 크면 클수록 고조선에 대한 일반 국민의 관심은 고조됐다. 이 무렵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열린 윤교수의 특강에
1500여 명의 일반관중이 몰려들 만큼 ‘고조선 제대로 알기’ 열풍이 불었다. 1986년 3월 윤교수는 ‘사학지’를 통해 ‘위만조선’에 대한
새로운 학설을 제기했다. 종래 사학계의 통설은 한반도 북부 평양지역에서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대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윤교수는 위만조선은
지금의 요서지역에 위치하고 고조선과 병존했던 정치세력이라고 주장했다. 즉 기원전 195년 서한에서 망명한 위만이 기자의 준왕으로부터 정권을
탈취해 세운 나라가 위만조선이며, 훗날 서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고조선의 서쪽 변경까지 침략해 지금의 요서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이 학설대로라면 고조선-준왕(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여러 나라 시대(열국시대)-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로 되어 있던 고대사 체계가 바뀌어야
한다.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으로 이어지는 정권교체는 맞지만 이는 지금의 요서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이와는 별도로 고조선-열국시대(동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동예, 최씨낙랑, 삼한 등)-사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남북국시대(신라, 발해)의 체제가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론이 심상치 않자 1986년 11월 당시 문교부는 국사교육심의회(위원장 변태섭)를 발족하면서 단군조선을 비롯, 일제의 의해 조작·왜곡된
한국사를 복원해 새 국사교과서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윤교수는 30여 명의 심의위원 가운데 가장 젊은 40대 위원으로 발탁됐다. 그는 다른 것은
몰라도 대동강 유역으로 제한된 고조선의 강역만큼은 반드시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선생님뻘 되는 다른 심의위원들의 반대가 심했다. 고칠 필요가
있더라도 천천히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윤교수는 마음이 바빴다. 고조선 땅의 넓고 좁고의 문제를 떠나 고조선 역사를 바로 세워야 다음 시기의
혼란도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고조선이 붕괴된 후 흑룡강성 지역에는 부여, 연해주에 읍루, 함경도에 동옥저, 강원도에 동예, 남쪽에는 삼한 등이 있었습니다. 기존
학설에 따르면 고조선은 그 중 하나이고 다만 조금 먼저 세워진 나라일 뿐이죠. 그러나 고조선이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르는 큰 나라였다고 하면
고조선 붕괴 후 지방세력이 독립해 여러 나라로 갈라서는, 역사체계 자체가 달라집니다. ‘삼국사기’에는 경주에 신라를 세운 사람들이 조선의
유민(遺民)이라고 되어 있는데 왜 유민(流民)이 아니라 유민(遺民)인지도 주목해야 합니다. 흘러들어온 사람이 아니라 잔류한 백성이라는 것은
고조선이 한반도 남쪽까지 차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하죠.”
하지만 심의위원 가운데 윤교수의 주장에 동의한 사람은 단 두 명(손보기, 박성수)뿐이었다. 윤교수는 그날로 심의위원직을 사퇴하고 학생들과
강원도로 답사를 떠났다. 그런데 언론이 윤교수의 사퇴 이유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한바탕 야단이 났다. 결국 변태섭 위원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개편되는 중·고교 국사교과서(중학교는 1989년, 고등학교는 1990년)에 고조선 초기의 정치·문화적 중심이 요령지역이었음을 명기하겠다고 밝히며
사태는 일단락됐다. 그러나 이후로도 한국 고대사에서 ‘학문의 국수주의화’냐 ‘식민사관의 청산이냐’는 논쟁은 계속됐다.
윤교수는 그때 국사교과서에서 고조선의 영토는 넓게 그려졌지만 여전히 기자의 후손인 준왕이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것처럼 서술된 점에 대해
불만이 많다. 현재 통용되는 한국사 개설서나 교과서에는 위만이 준왕에게서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건국해 고조선의 뒤를 이은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사료의 비판적 해석 필요
“이 서술대로라면 우리 민족은 기자가 망명한 기원전 1100년 무렵부터 낙랑군이 축출된 기원 313~315년 무렵까지 무려 1400년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돼요. 일제 35년은 대단한 치욕으로 생각하면서 1400년 중국의 지배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삼국유사’는 ‘(단군이) 나라를 다스린 지 1500년 되는 해인 기묘년에 서주 무왕이 즉위해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후에 아사달로 돌아와 은거하다가 산신이 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것을 잘 해석해야 해요. 지금까지는 단군조선이 건국 후
1500년 되던 해에 끝이 나고 통치자가 기자로 바뀌었다고 해석했지만, 사실은 그런 뜻이 아니라 기자가 조선에 봉해진 시기에 고조선은 도읍을
아사달에서 장당경으로 옮겨 그대로 존속했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이런 혼란을 초래했다고 말한다. ‘제왕운기’는 단군조선이 망한 뒤 기자가 조선에 와서 통치자가 됐다고
기록한다.
“이승휴 선생은 유학자로서 중국을 숭상한 분입니다. ‘제왕운기’가 우리의 역사를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상권이 중국역사고 하권만이
한국사입니다. 즉 중국사를 죽 서술하고 그 밑에 한국사를 붙인 것인데 이는 유가의 기본사상인 천하사상-중국 천자가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우리가 ‘소중화(小中華)’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서 고조선, 기자조선, 위만, 한사군으로 이어지는 것이 오히려
당연했죠. 이승휴 선생의 학설이 광복 후까지 비판 없이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민족사의 출발점에 서서
“길을 잃었을 때는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서 방향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윤교수가 30년 가까이 고조선에 몰두한 이유도 그것이
우리 민족사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통용되는 한국사 개설서가 대부분 분열의 시대인 삼국시대부터 시작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고조선은 2000년 가까이 존재한 나라입니다. 2000년이면 신라가 건국한 이래 오늘날까지를 합친 만큼 오랜 시간이에요. 고대사회라
지금처럼 조직적인 중앙통치가 불가능했다 하더라도 한 나라를 이루고 그만큼 오랜 세월을 존속했다면 민족공동체의식이 형성되지 않았겠습니까. 그후
사국(윤교수는 가야를 합쳐 사국시대를 주장한다)으로 갈라졌다 해도 끊임없이 공동체 복원을 바라고 통일은 당연한 과업이었을 겁니다. 고조선이
만주와 한반도를 지배한 국가였다면 자연스럽게 부여나 고구려, 발해가 우리 역사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고조선이 대동강 유역의 조그만 국가였다면
부여, 고구려, 발해가 중국 역사에 편입된다 해도 할 말이 없어요.”
이 대목에서 슬쩍 윤교수에게 “그동안 역사가 정치에 이용당한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더니 의미심장한 답이 돌아왔다.
“정치하는 분들이 필요에 따라 역사를 이용했지요. 사실 역사를 정치에 이용하려 했다면 생각이 있는 사람이에요. 한심스러운 것은 아예 역사에
관심이 없거나 이용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죠.”
정년을 앞두고 윤교수는 칭찬보다는 매가, 격려보다는 비난이 돌아오기 일쑤인 고대사 분야에 관심을 갖는 후학이 드물다고 안타까워한다. 그나마
고고학을 빼면 문헌사 분야에서 삼국시대 이전 상고사를 전공하는 박사급 연구자가 다섯 손가락에 꼽힌다.
“논문을 썼을 때 칭찬받으면 좋겠지만, 누군가 반론을 제기해도 성공한 것이죠. 반론도 칭찬도 없는 논문이 제일 가치가 없어요. 저는
제자들에게 제 학설을 따라오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제자는 내 것을 뛰어넘어야지, 이미 내가 다 해놓은 것을 따라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학문은 스스로 틀을 깨는 작업입니다. 내가 쓴 논문이라도 세월이 지나 잘못된 점이 발견되면 남이 지적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고치는 것이 학자의
도리입니다.” (신동아 200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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