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고대사의 열쇠 ‘치우천왕’ 논쟁

“치우를 잃으면 고조선 역사도 사라진다”

 ●‘붉은악마’와 함께 부활한 군신 치우는 역사인가 신화인가
● 동아시아판 트로이 전쟁 ‘탁록대전’
● 염·황·치의 자손임을 강조하는 중국의 속내
● 치우는 동아시아 공동의 조상이다

중국이 지난해부터 5년에 걸쳐 200억위안(약 3조원)을 투입해 고구려를 그들의 역사 속으로 편입시키는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라고 한다. 중국 공산당을 대변하는 ‘광명일보’는 아예 ‘고구려는 중국 역사의 일부분’이라고 못박았다. 이 소식을 접한 한국인들은 왜 갑자기 중국이 남의 나라 역사를 훔쳐가려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단순히 중국의 국경문제나 동북지역 소수민족의 동요를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며, 따라서 고구려사 왜곡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 속에는 중화사상이라고 하는 오래된 중국의 패권주의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한 동북공정의 다음 목표는 치우천왕(蚩尤天王)이 될 것이다. 치우를 중국 역사로 편입함으로써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이 부분은 이미 그들의 역사가 됐다)을 포함한 고조선 전체의 역사를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치우천왕의 존재는 2002년 월드컵 대회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붉은악마’의 상징물로 활용된 귀면(鬼面)의 주인공이 바로 치우천왕이다. 기원전 28∼26세기에 존재했던 치우는 금속을 제련하여 무기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각종 전투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해 황제 헌원을 위협했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은 그를 전쟁신·군신·수호신으로 받들었다.

치우천왕은 누구인가

치우에 대한 기록은 ‘사기’를 비롯해 40여 종의 중국 사서에 등장하지만 불행하게도 한국의 정사에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환단고기’나 ‘규원사화’ 처럼 위서(僞書)로 치부되는 책에 자세히 기록돼 있을 뿐이다. 먼저 ‘사기’를 비롯한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치우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치우는 구려의 임금이었으며, 고대 천자의 이름이다.

▲ 구리 머리에 철 이마(銅頭鐵額)를 하고 모래를 먹었으며, 금속을 제련해서 다섯 가지 병기를 만들었다(청동기 유적 발굴로 입증되고 있음).

▲ 난을 일으키기 좋아하고 난폭하여 황제에 굽히지 않다가 잡혀 죽었다.

▲ 그의 묘는 산동성 수장현에 있고, 매년 10월에 제사를 올리는데 붉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 군(軍)의 우두머리는 모두 그에게 제사를 올렸는데, 특히 유방은 통일을 위한 마지막 풍패전투에 나가기 전에 치우사당에 참배하고 승리한 후 서안에 그의 사당을 짓고 높이 받들었다.

한국의 사서에 나오는 치우에 대한 기록으로는 ‘삼국사기’와 ‘동사강목’에 ‘치우기’라는 혜성이 나타났다는 내용이 유일하며, ‘연려실기술’ ‘대동야승’ ‘청장관전서’ 등에서는 중국의 기록을 인용해놓았을 뿐이다. ‘성호사설’에는 우리의 민속을 설명하면서 치우를 수호신으로 모시고 제사(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치우사당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세 차례 나온다)를 지냈다는 내용이 언급돼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와 ‘규원사화’에는 치우천왕이 배달나라 14대 임금(재위 109년, 기원전 2707∼2599)이며 황제와 치우가 패권다툼을 벌이게 된 경위, 치우가 만들었다는 무기의 종류와 전투방법, 10년간 73회나 치렀다는 주요전투의 내용, 염제 휘하의 한 군장이었다가 난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염제로 등극하는 과정, 쇠를 캐 제련하는 과정 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지금까지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치우는 바로 ‘고구려’의 전신인 ‘구려(九黎=九麗·九夷·句麗)의 임금이었으며, 치우가 수도를 청구로 옮겼다고 했으니 구려의 영역은 태백산 신단수가 있던 만주지역에서 청구가 있는 산동반도까지 이어졌던 것 같다. 기마족의 이동폭이 넓었음을 인정하면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상고시대 동북아시아에는 화하족(華夏族 또는 漢族), 동이족(東夷族), 묘만족(苗蠻) 등 3개의 부족집단이 있었다고 본다. 분포지역을 보면 화하족은 섬서(陝西)성 황토고원을 발상지로 황하 양안을 따라 중국의 서방과 중부 일부지역을 포함했고, 황제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동이족은 산동(山東)성 남부를 기점으로 산동성 북부와 하북(河北)성, 만주지역, 한반도, 일본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하남(河南)성 동부, 남쪽으로는 안휘(安徽)성 중부에 이르며,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거주했다. 동이족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소호·태호·염제·치우 등이 있다. 묘만족은 호북(湖北)성과 호남(湖南)성을 중심으로 거주했고, 삼묘·구려·형만·요족 등 30여 개의 지파가 있으며 치우는 그들의 공통 조상이다. 여기서 치우는 동이의 대표적 인물이면서 묘족의 조상이기도 하니, 구려가 동이의 부락이었다가 남쪽으로 이동하여 묘족연맹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트로이전쟁 못지않은 탁록대전

치우 시기에 이르러 동이연맹(고을사회로 볼 때)을 다스리던 염제(왕호, 사람 이름이 아니라 여러 명의 염제가 있음) 유망이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여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같은 동이연맹 군장의 아들이던 황제 등이 제위를 탐하므로 이를 바로잡기 위해 구려족 임금인 치우가 일어났다. 그러나 어리석은 염제 유망이 제위를 찬탈하려는 줄 알고 황제와 손을 잡고 치우와 대적한다(이에 앞서 염제는 황제와의 싸움에서 졌다). 하지만 황염동맹은 치우에게 대패하고 치우는 공상에서 동이족연맹의 임금인 염제가 되니 마지막 염제였다.

같은 동이족 연맹의 일원이던 치우와 황제 헌원은 10년간 73회나 싸웠으나 황제는 늘 패했고, 그러면 여성들에게 쫓아가 도움을 청하여 그 군대를 이끌고 다시 도전했다가 또 패하곤 했다. 여기서 여성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에 대해 ‘여성들이 황제를 좋아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당시는 모권사회였으므로 각 부락의 실질 지도자가 여성이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치우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무기인 금속무기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안개를 일으키고 비와 바람을 부르는 등의 도술을 행했다고 하니 승리는 당연했을 것이다.

그 후 그들의 마지막 싸움이자 동양 역사기록상 첫 대전인 ‘탁록대전’이 현재의 베이징 서북쪽에 있는 탁록(?鹿)에서 벌어진다. 이 대전은 기마족이 내려와 농경족과 섞인 동이족 가운데서, 부계사회를 지향하는 기마족 문화의 치우와 모계사회 지향의 농경문화의 황제 간의 충돌이었다. 한신대 김상일 교수는 동쪽의 정신문화와 서쪽의 물질문화의 충돌이라고 설명한다.

이 전쟁으로 중국에서는 치우가 죽었다 하고, 우리쪽 기록에 따르면 치우군의 부장인 치우비가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투 후 치우는 묘족의 시조가 됐고, 무덤이 산동반도 서남쪽에 있으며 군신으로 추앙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탁록에서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최근 중국의 탁록중화삼조문화연구회(?鹿中華三祖文化硏究會)는 탁록지역에서 4개의 치우 무덤을 찾아내고, 그 중 1개가 진짜 치우 무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치우가 탁록에서 죽었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려는 의도다. 그러나 산동성에서는 ‘한서’의 기록을 인정하여 지역 내에 있는 3개의 무덤 중 문상현 남왕진의 무덤을 진짜 무덤으로 보고 작년부터 복원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어쨌든 탁록전투로 인해 동북아시아에서 동·서 문명의 특성이 구분되어 뚜렷하게 다른 문화집단이 형성되었으며, 그 두 문화집단(모권·물질 대 부권·정신)의 갈등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순임금이 부권사회를 지향하다가 자기 딸들에게 독살당한다는 금문학자들의 주장을 보더라도 역사적으로 모권과 부권의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다.

치우에 집착하는 중국

이렇듯 의미가 깊은 치우천왕의 역사지만, 그의 활동영역이 대부분 현재의 중국 땅인 데다 국내 문헌사료의 부족 등을 이유로 국내 학계는 치우 연구를 소홀히했고, 아예 중국 고대의 신화인물로 치부하고 있다. 반면 중국측은 몇 년 전부터 “치우는 묘족의 선조일 뿐 아니라 황제, 염제와 더불어 중화민족 역사의 3대 인문시조(人文始祖)”라고 주장하고 치우 복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치우가 중국의 조상이라면 그가 다스린 ‘구려’와 그 후신인 고구려는 자연스럽게 중국 역사에 편입되고, 치우의 영역과 법통을 이어받은 고조선 역사마저 중국에 귀속될 것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삼황오제(三皇五帝)를 신화적 존재로 보았고, 하우(夏禹)부터 실존 역사로 취급했다. 황제의 자손인 하우를 그들의 조상으로 받들면서 스스로를 화하족이라 불렀다. 그 외에 염제의 후손인 동이족과 치우의 후손인 묘만족은 오랑캐라며 야만족 취급을 했다.

1997년 4월 호남성 이안링(炎陵縣)현에 있는 염제 신농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높은 산 위에 ‘염황지자손(炎黃之子孫)’이라는 큰 간판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중국인들이 황제의 자손(子孫)일 뿐 아니라 염제의 자손이기도 하다는 것을 강조한 문구였다. 그동안 중국에서는 유적유물의 발굴작업이 진행될수록 황하문명을 비롯해 선진(先秦) 문명의 주인공이 그동안 오랑캐라 비하하던 동이족 임이 드러나고 있었다. 한자를 비롯해 우수하다고 알려진 많은 중국문화가 한족의 문화가 아니라는 연구도 속속 나옴에 따라 황제의 자손인 것만 강조해서는 더 이상 정통성을 인정받기 어려운 상태가 된 것이다.

여기에 1988년 덩샤오핑(鄧小平)이 ‘염황자손(炎黃子孫)’이라는 휘호를 앞세워 ‘소수민족 끌어안기’를 강조함에 따라, 중국 내에서는 동이족의 시조 염제(炎帝 神農)를 자기들의 시조에 포함시키려는 운동이 벌어졌다. 정치적 목적의 ‘동화정책’에 따라 한 민족이 두 조상을 갖게 된 것이다.

1999년 6월 필자는 ‘한배달’ 치우학회 회원들과 함께 동이족의 역사현장을 답사하기 위해 산동반도와 탁록지역을 찾았다. 베이징의 서북쪽에 있는 탁록에는 탁록중화삼조문화연구회가 주축이 되어 1995년에 세운 귀근원(歸根苑)이라는 사원이 있고, 그 가운데 ‘삼조당(三祖堂)’에 염제·황제·치우제 세 사람의 좌상을 안치하고 참배를 하고 있었다. 이미 치우가 중국의 역사에 편입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치우를 ‘난폭하고 난을 일으키기 좋아하는’ 야만족으로 취급하고, 염제와 황제의 가장 큰 업적이 치우의 정벌이라 자랑하던 중국인들이 이제는 치우를 황제·염제와 같은 반열에 올려 스스로 ‘염·황·치(炎·黃·蚩)의 자손’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상이 셋이 된 이상 황제의 자손이라는 화하족만으로는 이를 설명할 수 없으므로 화하족(황제의 후손)과 동이족(염제의 후손) 및 묘족(치우의 후손)을 합쳐 ‘중화족’이라는 새로운 민족 명칭을 만들어냈다. ‘중국은 한족(漢族)과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라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었고, 이로써 중국은 동이의 역사, 묘족의 역사를 모두 ‘중화족’의 역사에 포함시킬 수 있는 근거를 갖게 됐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에서는 ‘염·황·치’ 삼조를 모시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여, 1993년 10월 탁록중화삼조문화연구회 런창허(任昌和) 회장이 ‘염·황·치 삼조문화의 관점’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공식화되기에 이른다. 이어 탁록삼황삼조문화학술토론회가 열리고, 1995년에 귀근원을 만들면서 삼조문화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으며, 후속 연구도 활발했다. 한마디로 정부의 지원 아래 대대적인 치우 끌어안기 사업이 진행된 것이다.

2001년 산동반도의 치우무덤을 찾았을 때 주민들 대부분이 그 위치 조차 알지 못했으나, 2002년 봄 명지대학 진태하 교수 일행이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는 산동성의 치우 무덤을 복원 중이었다. 또 호남성에 치우의 동상을 세우고 1993년부터 ‘간추절(켋秋節)’ 행사를 개시하여 묘족의 독특한 문화전통을 살리면서 경제발전의 중요한 창구로 사용하기도 하고, 세계 치우학술대회를 열어 치우에 대한 연구범위를 세계로 확대하고 있다. 이는 치우와 관련한 문화의 흔적이 미국 오대호지방과 남아메리카, 북유럽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중국학자 왕대유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이처럼 중국인들은 1980년대까지 자신들의 조상인 황제에 대항했다 해서 미워하던 치우를 공동조상으로 받들면서 세계적인 공인을 얻으려 하고 있다.

치우 무덤과 유적복원 활발

2001년 옌볜대학에서 열린 치우학술대회에서 중국측으로는 유일하게 치우에 대해 발표한 짜오위다(趙育大)씨는 “치우의 문화가 한족의 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황제와 치우 중 누가 정통이고 누가 비정통이라는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우리측과 비슷한 주장을 하기도 했으나, “중화민족은 황염동맹을 핵심으로 한다” “치우는 묘족의 시조”라고만 하고 동이의 수장이었음은 간과했다. 또 “중화문명사에서 전환적인 의미를 띄는 인문시조”라고 하여 당시 동서문명충돌론이 아니라 중화문화라고 하는 문화집단만을 강조했다. 한편 “치우가 탁록에서 죽었으므로 그 무덤도 당연히 탁록에 있어야 한다”면서 산동성에 있다는 ‘한서’의 기록을 무시하는 등 치우라는 걸출한 인물을 인정하면서도 중화문화라고 하는 카테고리 속에서만 보려고 해 ‘동서 문화충돌론’을 주장한 한신대 김상일 교수와 상당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김교수는 “두 문화집단이 있어 충돌이 생기는 것이므로 중화문화 하나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는 중화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필자가 “공동시조로서 함께 연구하자”고 제안해 앞으로 연구 교류하기로 합의했다. 이 학술대회를 통해 옌볜대학 교수들에게 ‘치우는 우리 조상’이라는 점을 알려줌으로써 “우리도 연구를 시작하겠다”는 반응을 얻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정부가 과연 조선족에게 그런 연구를 허락할지 미지수다.

이렇게 중국이 치우에 집착하는 이유에 대해 단순하게 소수민족을 끌어안는 동화정책의 일환이며, 한반도의 남북통일시 생길 수 있는 국경문제에 대비하고, 문화유적의 관광자원화를 통한 경제발전을 추구하는 실리적 목적이라고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고구려는 물론 고조선을 포함하는 동이·묘족과 관련된 모든 역사를 하나의 중국사로 끌어가려는 논리로서, 패권주의인 중화사상의 부활을 예고하는 것이라 하겠다.

삶 깊숙이 자리잡은 치우의 흔적

이처럼 중국이 일방적으로 치우 연구를 진행하면서 모든 치우의 후예들을 ‘중국인화’하는 것을 경계하려면 국내에서도 치우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사실 치우를 한(漢)족의 시조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이미 ‘중화족’ 속에 포함된 동이와 묘족의 조상인 것은 분명하다. 즉 치우는 우리의 조상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조상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누가 더 많은 연구를 하고 어느 지역에 그 흔적이 원형대로 많이 남아 있느냐, 또 그 유산을 누가 더 현대화하느냐에 따라 치우의 역사가 중국의 것이 되거나 우리의 것이 될 수 있고, 또는 둘 다의 것이 될 수도 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치우에 대한 정서와 평가는 일반 대중과 학계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지난 월드컵 이후 국민들은 치우를 당연히 우리 역사로 인식하고 있는 반면, 학계는 ‘치우가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을 뒷받침할 실증적 자료가 없다’며 여전히 ‘중국 고대의 신화적 인물’로 보고 있다. 앞서 밝혔듯이 그나마 치우에 대한 기록이 있는 책들은 모두 위서(僞書)로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일상생활 곳곳에서 치우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장승의 모습으로, 혹은 주요 건물 입구에 서 있는 해치(또는 해태, 사천왕)의 모습으로 치우는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친밀한 홍소로,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에게는 무서운 포효로 보이는 표정을 통해 악귀로부터 마을의 재액을 막아주고 있는 것이다. 또 기와집 치미나 막새기와(귀면와)에 위치하여 집을 화재와 재액으로부터 보호해주고, 동짓날에는 붉은 팥죽이 되어 병마와 액운을 막아준다. 또한 단오절 적령부(赤靈符)라는 붉은 부적을 통해 개인과 집안을 보호해주기도 하고, 군사들의 방패와 무기와 군기(軍旗), 투구 등에 새겨져 승리를 일궈내는 군신으로 작용을 하며, 잡귀를 막아주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붉은 도깨비로 항상 우리 곁에 머물렀다.

도깨비 연구가인 조자용 박사나 윤열규씨에 의하면 도깨비는 중국과 일본에도 있지만 한국의 도깨비만이 소뿔이나 자신감에 넘치는 홍소 같은 치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소뿔 투구를 쓰고 경기를 하는 치우희, 고구려 벽화에서는 각저희라고 했던 씨름은 현재 우리 민속의 대표적인 놀이가 되어 있으며, 소뿔 대신 황소를 상으로 준다.

상고사 연구는 어디로

사실 한국 상고사 연구자들은 정사로 인정할 만한 단군 이전의 민족사 기술이 거의 없어 발을 구른다. 단군도 신화적 인물로밖에는 취급할 수 없는 상황이니 그 이전의 역사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한민족, 배달민족이라는 말의 출처가 바로 ‘환단고기’라는 것이다. 책 자체는 위서로 의심받고 있지만 이 책에서만 볼 수 있는 한민족, 배달민족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류학의 보편적인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1만년 전후 중석기 내지 신석기 시대가 되면서 떠돌이 생활을 마감하고 정착생활을 시작하는데, 이때 작은 부락 단위로 생활했기 때문에 부락사회 또는 마을사회(단국대 윤내현 교수의 주장) 시대라 한다. 그러다 약 6000년을 전후하여 인구가 급격히 늘면서 식량이 부족해지자 전쟁이 일어나고 자기 보호를 위해 서로 연맹을 시도한 부락연맹사회 또는 고을사회(윤내현)가 형성된다. 그 후 청동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4500년 전후 고대국가가 탄생했다. 기록이 있는 것은 바로 국가사회부터다. 그 이전의 역사는 창세신화를 비롯한 다양한 신화와 전설의 형태로 전해졌다.

화재와 재액으로부터 집을 보호하기 위해 기와집 치미와 막새기와에 새기는 도깨비의 모습은 바로 치우의 흔적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도 고조선이라는 국가 이전에 마을이나 고을사회 단계가 있었을 것이며, 이와 관련한 신화나 전설이 구전이나 무가(巫歌) 형태, 또는 야사로 남아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학계는 단군 이전 시대를 역사화하는 데 관심이 없었으며 아예 역사에서 지워버림으로써 그 속에 포함된 치우의 역사도 당연히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중국 역사책에 ‘치우가 동이족이며, 구려의 임금’이라고 적혀 있는 만큼, 만약 그 때를 우리의 고을사회 역사로 해석해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의 내용으로 이를 보완한다면 훌륭한 단군 이전사가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도도 해보지 않고 우리 스스로 한민족의 역사를 한반도 안으로 가져왔다.

예를 들어 만주지역에 있던 요·금·원·청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에서 일어났으며, 중국 고대사에서 동이로 분류되던 민족이 세운 나라들이다. 따라서 우리 겨레의 역사에 포함시킬 수도 있으나 우리는 말갈, 여진, 만주족이라며 오랑캐로 몰았고 우리의 역사에서 제외시켰다. 대신 중국은 “지배를 받았지만 문화로 흡수했다”는 논리로 자국 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대조영이 세운 나라 또한 처음에는 ‘진’이었으나 당나라가 멋대로 ‘발해국왕’에 봉하자 나라 이름도 발해로 바꾸었고, 지금도 우리가 스스로 부른 이름 ‘진’보다는 ‘발해’라고 부르고 있으니, 중국은 이를 근거로 ‘발해가 당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실린 지도를 보면 난하 동쪽, 청천강 이북까지만 고조선 영역으로 표시하고, 그 남쪽을 삼한이라고 해놓았다. 그리고 많은 국내 학자들이 한민족의 형성을 신라통일이나 고려의 재통일 이후로 보고 있다. 바로 ‘광명일보’의 주장처럼 ‘고씨 고려(고구려)와 왕씨 고려는 다르므로 고구려는 중국, 고려는 삼한의 후예인 한민족’이라는 주장이 나올 수 있는 빌미를 우리 스스로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이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할 날도 멀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또 국내 학자들은 한반도 밖의 한민족 청동기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다. 신용하 교수 등 일부 학자들이 고조선 영토로 거론하기도 하는 산동반도와 만주 요녕성의 경우 기원전 25세기까지의 청동기 유물이 나오고 있으나 우리의 문화로 인정받지 못했다. 북한이 주장하는 대동강 유역의 기원전 30세기 청동기 유물이나, 양수리에서 출토된 기원전 24세기 청동기 시대 유물들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이렇듯 민족의 형성기라고도 볼 수 있는 우리의 청동기 시기가 기원전 10세기 설에 묶여 있으니, 그 이전 인물인 치우는 물론 단군조차 역사적 인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 중국 학자가 “한자는 한(漢)족의 언어체계와 맞지 않으므로 한족이 만든 글자가 아니라 동이족의 글자다”라고 주장해도 동이족의 핵심이라는 우리는 한자가 우리 겨레의 글자일 가능성조차 무시해버린다.

이처럼 우리 사학계가 만주를 포기하는 동안 국민들은 의분에 젖어 백두산 관광길에 올라 ‘만주는 우리땅!’이라는 현수막을 걸어놓고 애국가를 부르는 등 대책 없이 중국측을 자극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중국정부가 한국의 국무총리에게 항의서신을 보내는 등의 해프닝이 발생하는 것도, 알고 보면 한국 고대사에 대한 논리적, 학문적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치우에 대한 연구는 재야에서 진행되고 있다. 겨레얼 바로찾기 운동단체인 사단법인 한배달은 1999년부터 중국의 치우연구 현황을 파악하는 한편, 그 해 12월말 치우학회를 설립해 국내외의 치우 관련 사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2000년과 2001년에는 한국과 중국(옌볜대학)에서 각각 치우학술대회를 열고, 치우자료집과 학회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경기대 법정대 고준환 교수가 ‘치우천황’이라는 책을, 소설가 이우혁이 ‘치우천왕기’라는 소설을 발표했지만, 학계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우리 스스로 포기한 역사

중국 ‘중화삼조당’에 모신 치우상.

2001년 옌볜대학에서 열린 제2회 치우학술대회(주제 ‘고대동아시아 종족과 한민족’)에서 확인한 바는 옌볜대학을 비롯한 중국내 조선족들에게 고구려 이전 역사연구가 금기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동이족, 묘만족, 화하족을 합쳐 ‘중화족’이라고 하면서도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임이 분명하고 선후를 이은 관계인 고구려, 발해에 대해서도 고구려족, 발해족 등 나라마다 민족의 이름을 붙여 같은 민족임을 부정하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소수민족을 우대한다고 하지만 결국 소수민족을 더욱 작은 단위로 나누어 자체연대나 단결의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이런 큰 그림 속에서 고구려사를 중국 역사에 포함시키는 ‘동북공정’이 계획되고 진행되는 것이다.

2003년 봄 동북아 경제포럼이 열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 지역은 본래 아시아인들이 살던 곳이지만 지금은 백인들이 주인이다. 1860년대 러시아가 부동항을 얻기 위해 극동함대를 앞세워 백인들을 이곳에 이주시키고 대신 아시아인(특히 고려인들)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결과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사관은 1860년 이전의 역사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불과 150년 만에 인구의 구성과 역사의 주도세력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 역시 200여 년 만에 원주민인 인디언의 역사는 사라졌다.

이렇게 지역의 역사와 종족의 역사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서술자의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만약 ‘만주지역과 산동반도 지역은 수천 년 전에도 중국 땅이었고, 한족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오랜 고정관념을 버리면 우리 고대사는 다시 쓰여져야 할 것이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사람의 시각에서 쓰면 처음부터 자신들의 영역이었던 것처럼 쓰거나, 그 이전의 역사는 빼버릴 가능성이 높다. 마치 미국과 블라디보스토크의 역사에서 원주민들의 역사가 지워진 것과 같다. 반대로 과거 거주했던 종족(원주민)의 시각에서 쓰면 미국은 인디언의 역사, 블라디보스토크는 발해인들의 역사가 될 것이다.

주도권 싸움 대신 공동연구를

현실적으로 보면 둘 다 옳다. 그리고 둘 다 사실이다. 그러나 이 둘이 조화돼야 완전해진다. 양국의 공통 조상인 치우 문화라는 공통점이 한국과 중국의 연대를 쉽고 강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치우의 역사가 종족간 다툼의 빌미가 아니라 협력과 화합의 근거가 돼야 한다. 치우의 종족적인 계보로 따지면 중국의 만주-산동반도-남서지역, 한반도, 일본, 대만, 동남아 지역까지 동이와 묘족의 거주영역이 모두 해당한다. 그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치우를 연구하고 발전시키며, 상호 교류를 통해 문화의 공통점을 찾아낸다면 아시아 공동체를 만드는 데 큰 힘이 될 수 있다.

고구려도 마찬가지다. 만주지역은 배달나라 시대를 빼더라도 고조선-고구려-진(발해)까지 약 3300년 동안 한민족이 나라를 세우고 거주했던 지역이다. 그러니 여기서 ‘지배층은 고구려족, 피지배층은 말갈족’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떻게 3300여 년 동안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살면서 민족이 다를 수 있겠는가. 말갈, 여진, 몽골, 만주족은 한민족 내지 배달민족(중국에서는 동이족)의 지류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우리와 일본의 조상이기도 하고 중국 동이족이나 묘족의 조상이기도 한 치우천왕. 각자가 자기 민족의 선조로 기록하고 있고, 양쪽이 다 옳다면 결론은 이렇다. 당시 동아시아에 큰 문화집단이 있었고, 그 지도자가 치우와 황제였으며, 그들 간에 충돌이 있어 각자의 문화 독창성이 더 강화되거나 상호교류를 통해 새로운 문화가 싹트기도 했을 것이다. 김상일 교수는 이를 동서문화의 충돌로 보았다. 종족의 이동과 문화의 이동도 있었을 것이다. 그 과정을 추적하여 동아시아의 상고사를 재정립하는 것이 오늘날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남겨진 과제다.

중국이나 중화만이 중심이어서도 안 되며, 한민족만이 중심이라고 해서도 안 된다. 각국이 보유한 역사기록과 전설, 신화, 민속 자료들을 최대한 수집하여, 너와 나를 버리고 양쪽의 공동 조상, ‘우리’의 조상인 치우를 연구하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박정학 치우학회 회장>

- 1947년 울산 출생
- 부산고, 육군사관학교,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 연세대 행정학 석사, 강원대 대학원에서 한국 고대사 전공
- 현 사단법인 한배달 회장, 치우학회 회장
- 현 강원대 강사, 강원고고학연구회 회장

(신동아 2003-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