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50년 걸려 러시아語 완역 “제 인생은 삼국사기를 완역(完譯)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 이상의 욕심은 없었지요.”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최초로 러시아어로 완역한 러시아 한인동포(고려인) 박 미하일(84) 교수는 11일 완역본인 3권의 책을 손으로
비벼대며 금세 감격에 젖었다. 지난 1950년대 중반 삼국사기 번역 작업을 시작한 지 50년 만에 완역을 해 낸 노학자의 학문적 정열은 러시아
학계에서 대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완역본 총 3권 중 1959년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번역한 제1권을 출판한 뒤 백제본기 제2권은 20년 동안 번역을 거쳐 1980년 작업을
끝냈지만 재정지원이 끊기며 출판을 하지 못했다.
“번역본만 덩그러니 나도는 모습을 보고 작업을 포기할까도 수십번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내가 포기하면 조국의 역사를 저버린다는
생각에 차마 학자의 양심을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박 교수는 러시아 주재 대사관 등 주위에 사정을 호소했다. 이를 전해 들은 한국 외교부 산하 국제교류재단이 재정지원을 하면서 1995년
백제본 2권이 완역됐고, 나머지 지·열전 부분인 최종 3권이 11일 출판됨으로써 결실을 본 것이다.
“이제 러시아에서는 한국사 중 삼국시대 1000년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생긴 만큼 동양학과 한국학을 연구하는 러시아인들에게 학문연구의
길을 터 준 셈이다”라고 말했다. 러시아 동양학 전문가들의 말 그대로 전달한다면 “박 교수의 완역은 과업(課業)이요, 사변(事變)”이다. 출판을
맡은 동양서적출판사측은 “러시아 최초의 삼국사기 완역은 러시아 내 동양학 연구의 최고 결실”이며 “러시아어를 아는 외국인 학자들에게 한국 연구
접근을 쉽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지난해 완역을 거의 마쳤지만 책 디자인 작업과 주해(註解), 삼국시대 지도 첨부작업이 지연되며 완역본 출간이 미뤄졌다”며
“단돈 100달러의 예산도 없이 시작한 번역작업이 완역의 결실을 보게 된 것은 국제교류재단 지원 때문에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삼국사기 외국어 완역은 일본어(日本語)를 제외하고는 처음이다. 미국도 현재 하와이대학에서 삼국사기 영문 번역작업을 12년째 하고 있지만,
완역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교수는 함경북도 경원에서 살던 조부모(祖父母)가 1869년 기사년 기근(飢饉)을 피해 얼음이 두껍게 언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국경 핫산
근방에 정착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10남매 중 홍역으로 7명이 사망하고 박 교수를 포함한 아들 3형제만 살아남았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한
한인 강제이주 당시 아버지는 일본 스파이 혐의로 총살됐다. 박 교수는 1936년 고교 최우등생으로 선발돼 모스크바대학에 입학하며 화를 면했다.
그는 “죽어도 한국 사람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 어머님의 유언이 없었던들 오늘의 결과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게 인생의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 정병선특파원 2003-2-11)
[고려人 역사학자] 삼국사기 러시아어로 완역
“이제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살아서 작업을 끝내다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삼국사기를 러시아어로 완역한 모스크바대학 동양학부의 미하일 박(83) 교수는 17일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삼국사기의 외국어 완역은
러시어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이다.
박 교수는 책 디자인 작업과 주해, 삼국시대 지도 첨부작업을 마치는 대로 삼국사기 완역본을 다음달 출판할 계획이다. 출판사측은 “한국
역사서의 완역은 처음이다”고 말했다.
미하일 박 교수의 삼국사기 번역은 러시아 고려인의 평생어린 집념이었다. 고려인으로 태어나 민족의 역사를 알기 위한 한국사에 대한 관심이
집요했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뒤 지난 1949년 모스크바대 동양학부 교수로 부임하며 삼국사기 번역에 몰두했다. 한자와 한문을 배우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1~2권 번역은 박 교수 혼자서 했지만 3권 완역에는 훈민정음을 완역한 동방학연구소 연구위원 콘체이비치 박사, 솔로비요프 박사,
자르가시노바 박사 등 3명의 후학들이 가세했다. 그가 작업을 시작한 지 53년 만에 삼국사기 완역이라는 대작은 태어났다.
박 교수는 작업 성과에 대해 “삼국사기에 대한 이론적 개념을 확보했다는 것”이며 “한국역사 문화유산에 대해 외국인들이 개념 정립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라고 의미를 두었다.
(조선일보 / 정병선특파원 200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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