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표절 국사교과서
국가가 편찬한 현행 고교 국사교과서를 보면 구석기시대 이후 삼국 및 가야의 성립 발전까지 옛 한민족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도대체 감을 잡지 못하게끔 되어있다.
국사교과서가 이런 혼란을 일어킨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 고조선 성립 이후
삼국 성립까지 고고학과 역사학이 각기 따로 집필한데서 말미암는다.
예컨대 고고학자는 삼국 성립까지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한국사가 구석기,
신석기를 거쳐 기원전 10세기쯤 청동기가 시작돼 족장이나 군장같은 강력한 지배집단이 출현했으며 그러다가 기원전 300년쯤에는 초기
철기시대에 들어갔다고 보고 있다.
반면 역사학자들이 집필한 대목에서는 청동기문화 기반 위에서 국가로서는 고조선이 가장 먼저 건국한 이후 그것이 붕괴된 다음에는 만주와 한반도 북쪽에서는 부여와 고구려,동예,옥저 등이, 중부 이남 지방에서는 일찍 있던 진국이 해체된 뒤 마
한,진한,변한의 이른바 삼한사회가 출현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고고학과 역사학이 같은 시기를 놓고 각기 다른 각도에서 한국역사를 따로 기술하다시피 하는 바람에 국사교과서를 읽는 학생들은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게끔 되고 말았다.
이를테면 상권 제2장 「선사문화와 국가의 형성」을 보면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 개막을 얘기하고 난 다음 난데없이 시대를 거슬러 청동기시대로 올라가 고조선을 시작으로 삼국이 출현하는 초기
철기시대로 다시 내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 국사교과서는 시간을 왔다갔다 하는 타임머신인 셈이다.
더욱 혼란을 부채질하는 것은 제2장 「선사문화와 국가의 형성」 중 `여러나라
의 성장'에서 부여,고구려, 동예,옥저와 백제.신라.가야가 포함된 한반도 중부 이남의 이른바 삼한 출현을 얘기해 놓고는 바로 뒤 제3장 「고대사회의 발전」에 가서
고구려와 백제,신라,가야의 초기역사를 다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도대체 어떤 곳의 고구려,신라,백제,가야가 진짜인지 알 수가 없다.
왜 이런 혼란이 빚어지게 되었는가를 곰곰 생각해 보면 기원전후~서기 300년 즈음 기간 동안 고구려,백제,신라 사회를 전혀 딴 판으로 전하고 있는 중국측 기록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우리측 역사기록인 『삼국사기』를 적당히 `짬뽕'했
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고구려,백제,신라가 기원전 1세기에 건국했고 적어도 기원후 1,
2세기 이전에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발돋움했다고 전하고 있는 반면 ≪동이전≫
은 고구려를 제외하고는 신라,백제는 78개나 되었다는 삼한의 여러 나라 중 겨우 이름만 내밀 정도로 그 세력이 형편없다.
그런데 우리 국사교과서는 제2장 「선사문화와 국가의 형성」 중 `여러나라의
성장'에서는 『삼국지』 ≪동이전≫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반면 제3장 「고대사회의
발전」의 삼국의 초기역사 부분에서는 『삼국사기』를 기본텍스트로 삼고 있다.
이런 혼란과 함께 국사교과서 `여러나라의 성장'이 표절하다시피 한 『삼국지』
≪동이전≫이 우리네 국사교과서에 그대로 옮겨다 놓아도 될 정도로 역사기록으로
가치가 있느냐 하는 문제는 정말 생각을 다시 해야 한다.
적어도 저자인 진수가 사망한 서기 297년 이전에 편찬됐음이 확실한 『삼국지』
중 ≪동이전≫은 전해종 전 서강대 교수가 밝혔듯이 당시 한반도 사정을 알 리 없는 진수가 책상머리에 앉아 긁적거린 기록, 즉 두찬(杜撰)에 지나지 않는다.
≪동이전≫이 말하는 마한,진한,변한의 삼한이 도대체 언제부터 언제까지 존재
했는지 ≪동이전≫ 자신도 모르거니와 삼한 78개국 중 하나로 나타난 백제국과 사로국(신라) 또한 언제쯤의 백제와 신라인지도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역사기록으로는 결점 투성이임에도 편찬시기가 빠르다는 단 하나 이유만
으로 『삼국사기』는 팽개친 채 ≪동이전≫만이 기원전후~서기 300년 기간 동안 한반도 중남부 역사기록을 제대로 대변하는 유일한 기록인양 여기고 있는 것은 한국고대사학계에 팽배한 중화사관에서 비롯된다.
비단 ≪동이전≫ 뿐만 아니라 우리 고대사학계에서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이 중국기록과 다르기만 하면 덮어놓고 중국기록을 손들어 줬다.
이런 중화사관의 대표적인 보기가 현행 국사교과서 상권 45쪽 "(고구려의) 왕권
이 성장하면서 고(高)씨에 의한 왕위의 독점적 세습이 이뤄지게 되었다"는 구절에
단 각주 "이것은 고구려의 왕실이 연노부에서 계루부로 바뀐 사실과 연관되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구절에서도 확인한다.
고구려 왕실이 연노부에서 계루부로 바뀌었음은 바로 『삼국지』 ≪동이전≫에
나온다.
그런데 이 기록대로 정말로 고구려에서 건국 이후 어느 시점에 왕실이 교체되었느냐 하는 문제는 다시금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서기 414년 고구려인들이 기록한 광개토대왕비에 따르면 광개토왕을
추모,유리,대해주류왕에 이은 제17세손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시조 추모왕 이후 고구려 왕실이 바뀌지 않았다는 명확한 증거가 된다.
물론 일부 학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삼국사기』와도 일치하고 있는 광개토왕비의 고구려 왕위계승표가 후대에 조작되었거나 신화처럼 꾸며졌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삼국지』 ≪동이전≫이 현재의 우리 고대사학자 대부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국사교과서가 표절할 정도로 기록이 정확하지도 않거니와 정말로
한국고대사 연구의 텍스트로 삼고자 한다면 『삼국사기』에 들이댄 것보다 더한 실증과 문헌고증을 철저히 하고 난 다음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 고대사학계가 실증과 문헌고증을 그토록이나 강조했음에도 ≪동이전
≫ 만큼은 실증이나 고증은 커녕 연구만 했으니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연합뉴스 200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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