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정복로 1만3000리를 가다 (4)
광개토대왕 때 무혈 점령…용담산성 짓고 중원 왕조와 맞대결
만주 평원의 길은 나즈막한 산자락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짙은 녹색의 옥수수밭 천지에 가끔 싯누렇게 익어가는 메밀밭이 섬처럼
박혀있는 초여름 평원 풍경이 차장 밖으로 다가왔다 사라지곤 했다.
선양(심양) 공항을 내린 답사단은 전성기 고구려의 남쪽 안마당인 남만주에서 북쪽 변경을 향해 달려갔다. 지난 6월 22일이었다. 북쪽
변경은 동북평원의 서북쪽 러시아 접경지대에서 발원한 넌장(눈강)이 동남쪽을 향해 흘러오다 남쪽에서 거슬러 올라온 쑹화장(송화강)과 합쳐지는
쑹위안(송원) 일대. 쑹위안의 옛이름이 부여시였던 데서도 알 수 있듯 고대왕조 부여의 고토이다.
이곳을 거점으로 기원 전 2세기에서 기원 후 2세기에 걸쳐 전성기를 누렸던 부여를 흔히 북부여라고 한다. 이 북부여의 일부가 지금의
옌벤(연변)으로 옮겨와 자리를 잡았는데 이를 동부여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익숙한 아란불, 금와, 주몽 같은 설화적인 얘기들의 무대는 실제로
동부여였다.
그러나 부여의 정통은 역시 북부여에 있었다. "고구려의 시조가 된 주몽이 자신이 넌장 부근에서 내려왔다는 점을 강조한 것도 이 점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답사단의 서영수 단국대 교수(한중관계사)가 말했다.
북부여의 고토는 광개토대왕 당시 무주공산이었다. 풍요로운 농경 국가였던 북부여는 이미 모용씨에 의해 멸망했고 그 지역 일대에는 아직 국가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물길이 흩어져 살아가고 있었던 탓이다. 광개토대왕은 재위기간에 쑹위안 남쪽 수십㎞ 지점에 있는 지린(길림)에 북방
전진기지인 용담산성을 건설하고 지방관인 수사를 파견하면서 이곳을 점령했다고 현지의 기록은 전하고 있었다.
부여의 고토를 향해 답사단의 마이크로버스는 선양과 하얼빈(합이빈)을 잇는 선하(심합)고속도로에 올랐다. 동북평원을 남북으로 잇는 이 도로는
그 옛날 고구려의 북방로에 해당했을 것이다. 임지로 가는 지방관, 변방의 역을 마치러가는 병사가 무시로 이 길을 따라 북으로 향해 갔을 것이다.
모피, 농산물 등을 들고 교역에 나선 고구려인들이나 수렵민족이었던 물길인, 반농 반유목 생활을 하며 소금 제조의 비법을 갖고 있었던 거란인들도
소금 등속을 들고 이 길을 따라 무역을 했을 터이다. 전시에는 군사진격로로, 평시에는 교역로로 고구려 제국의 혈관 노릇을 톡톡히 해냈던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길 주변의 낮은 산자락 어딘가에서는 벽화에서 나오듯 갈퀴 휘날리는 말 위에서 힘껏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고구려 무사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
이 고구려의 북방로는 이제 대륙에 불어닥친 경제 개발의 바람 속에 고속도로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선양을 나서자마자 답사단은 이 거대
도시의 벨트웨이 격인 선양환청(심양환성)에 오를 수 있었다. 그 길은 다시 선양과 하얼삔을 잇는 선하고속도로(심합고속공로)로 이어졌고,
300여km를 달린 뒤 다시 창춘(장춘)에서 지린(길림)까지 가는 창지고속도로(장길고속공로)로 연결됐다. 시원하게 뻗은 왕복 4차선 고속도로가
거미줄처럼 동북평원을 연결하고 있었다. 건설 초창기의 경부고속도로처럼 도로는 한적했고 달리는 차들의 속도도 고작 시속 50∼60Km를 헤아릴
정도로 느릿느릿했다.
차창 밖으로 바라다 보이는 만주평원에는 수천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켜켜이 쌓인 역사의 스펙트럼이 교차하고 있었다. 한때는 부여가, 그리고
뒤를 이어 고구려가 그곳에 역사의 퇴적층을 만들었고 또 그 위에 말갈, 만주족의 역사가 내리 덮였다.
답사단은 그 역사의 퇴적층 아래 숨어 있는 고구려의 흔적을 찾아보고 싶었다. 그 첫 번째가 고구려 천리장성 유적지였다.
오전 중 잔뜩 흐린 날씨 속에 선양을 출발한 답사단은 티에링(철령), 카이위안(개원), 쓰핑(사평)을 거쳐 창춘을 눈앞에 둔
꿍쭈링(공주령)에서 왼쪽으로 길을 갈라 들어갔다. 지린(길림)성 고고문물연구소에 따르면 꿍쭈링 인근의 훼이더(회덕)현에 연개소문이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해 쌓았다는 고구려 천리장성이 남아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었던 것이다.
전형적인 중국 시골마을인 훼이더현 황화촌에 도착한 것은 그날 오후 6시쯤. 비가 흩뿌리는 탓에 사위는 벌써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천리장성
유적이라고는 하지만 멀리서 보면 옥수수밭 사이에 도드라지게 솟아오른 언덕 같이 보였다. 그 위로 수십년은 된 듯한 버드나무 몇그루가 서있었는데
언덕 위를 올라서고나서야 높이가 1∼2m 정도인 성벽이 버드나무들을 따라 1km 남짓 북쪽으로 뻗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성벽 서쪽으로는 일부러 만들어놓은 듯한 나즈막한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동쪽으로는 옥수수밭이 무성했다. 당군은 그 잔디밭으로 쳐들어 왔을
터이고 고구려 군은 옥수수밭 쪽에서 성벽을 사이에 두고 당군과 대치했을 것이었다. 성벽에는 고구려 특유의 축성법에서 나온 옹성이 남아 있어
이곳이 고구려 천리장성일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었다. 일부 중국학자들은 고구려 천리장성이 이 유적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발해만의 잉커우(영구),
북쪽으로는 쑹위안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사서에 '천리장성의 동북쪽 끝이 부여성'이라고 했으니 부여의 고토와 천리장성은 그렇게
비정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학계에서는 하나의 유력한 설에 불과하지만 현장에 있는 답사단에게는 그것이 현실인 것처럼
느껴졌다.
"1950년대만 해도 이곳이 잘 보존돼 있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고 한 답사단원이 말했다. 이 성벽을 부르는 현지 이름은 변강도.
동북평원의 사람들은 이 성벽을 길 삼아 마차를 몰고 멀리 발해만까지 내왕했다고 하니 고대의 성벽은 후대 사람들이 막막한 평원에서 길을 찾아가는
등대 역할도 한 것같았다.
그토록 긴 세월 동안 이 천리장성이 어떻게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문득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40대의 한
마을 남자로부터 이곳에 얽힌 전설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옛날 이곳 버드나무 아래에서 동네 처녀 셋이 차례대로 목을 매달아 죽었는데 그 이후로
이곳은 마을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저녁에는 아예 가까이 가지도 못하는 곳이 됐다고 한다. 옥수수밭 개간이 이뤄질 때도 중장비로 이 언덕을 몇번이나
밀어버리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기계가 고장나 도저히 밀어버릴 수 없어 그냥 내버려뒀다는 것이다. 참으로 질기고 질긴 인연으로 천리장성은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훗날 찾아올 후손들을 기다렸단 말인가!
고구려 북쪽 변경의 전진기지인 지린시 용담산성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오전이었다. 그곳에서 답사단은 부여의 젖줄이었던 쑹화장을 처음으로
만나볼 수 있었다.
지린시 동쪽을 남북으로 흘러가는 쑹화장변에는 부여와 고구려의 역사가 널려 있었다. 강변 산책로를 따라 도시 북쪽에 있는 용담산성으로 가는
길목에서 산책객들의 등 뒤로 동단산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그만 야산이지만 군사 요새였다. 병사와 군수물자를 싣고 쑹화장변을 오르내리는 병선들이
이 산성의 감시를 피할 방법을 찾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바로 그 산성 뒤로 부여의 왕궁터가 발굴됐다고 했다.
지금은 용담산공원이 된 용담산성은 첫 입구에서부터 고구려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입구에서 "이 성은 고구려 광개토대왕 때
축조됐다"는 지린성 문물보호당국의 안내판을 볼 수 있었다. 중국의 문화재당국이 안내판에까지 고구려라는 말을 써놓은 곳은 이번 답사중 이
용담산성이 처음이자 유일한 것이었다.
곳에 따라 2∼10m에 이르는 높은 성벽이 웅장하고 둘레의 길이가 2.4km에 이르는 규모도 이 산성이 고구려의 북방 전진기지임을 엿보게
했다. 돌을 정교하게 쌓아올려 만든 수뢰라는 이름의 축수지, 땅을 파들어간 뒤 역시 둘레에 돌을 쌓아 범죄자나 포로를 가두는 데 쓴 한뢰,
고구려인의 성벽 축조술이 만들어낸 독창적인 발명품인 배수 시스템 … . 국내성이 있는 지안(집안)에서 1500리 이상을 북쪽으로 올라오는
이곳에서 답사단은 고구려 문화의 진수를 흠뻑 마시고 있었다.
대왕은 이곳에 이 거성을 만들어놓고 물길, 숙신, 말갈 같은 북방의 민족들을 다민족국가의 신민으로 흡수한 뒤 중원의 왕조와 대결할 힘을
길렀을 것이다. 말갈의 전사들은 고구려군의 훌륭한 전사로 변하지 않았는가?
남쪽 성벽 위에 오르면 발 아래로 쑹화장과 그 강변의 너른 들판, 부여 동단산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강을 가로지르는 철길이 놓여 있는
발 아래 너른 들판이 고구려 지방관인 수사의 처소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답사단에 동행한 교수들이 설명하고 있었다.
한반도 쪽으로는 백제와 신라, 중국 내륙과 동몽골초원 쪽으로는 후연, 거란을 연해주 쪽으로는 동부여와 치열한 정복전을 치른 대왕이 지방관을
직접 파견해 통치한 곳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왜 유독 이 북부여의 땅에 지방관을 배치해 다스리게 했을까? 이런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부여와 고구려는 한 민족이었다는 데서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겁니다." 답사단의 서영수 교수는 두 나라의 뿌리가 '예맥족'으로 하나였다는
데서 그 답을 찾았다. 거란과 부여는 고구려 입장에서 다같은 피정복 국가였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고구려인의 시각은 달랐다는 것이다.
다음 날인 6월 24일 답사단은 넌장과 쑹화장의 합수지점을 향해 쑹위안으로 달려갔다. 쑹화장의 넘실대는 물은 거란정복로에서 본
랴오허(요하)나 시라무렌강의 마른 강바닥과 달랐다. '다산릉광택'. 옛 사서는 부여의 땅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쑹화장의 너른 강변은 지금도
풍부한 물산으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있었다. 쑹위안의 쑹화장변에는 지금도 곳곳에 어부들이 작은 움막을 쳐놓고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 강상을
오가는 놀잇배에는 초여름 강바람에 취한 사람들로 북적댔다. 그 땅은 또한 풍요로운 유전지대이기도 했다. 쑹위안시의 한가운데로 송유관이 쑹화장을
건너가고 있었다.
대왕의 치세 때도 이 부여의 풍요로운 땅은 고구려 국력의 밑천이 되지 않았을까? 부여라는 어미는 제 몸을 살라 고구려 제국의 기틀이 됐던
것이 아닐까? 소름 끼치는 민족의 인연이 넌장과 쑹화강의 합수지점을 향해 배를 몰아가는 답사단의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들었다.<시리즈
끝> (주간조선 1999-12-2) |